'참을 얻기 위해 버린 나비의 꿈'

극단 떼아뜨르노리의 <나비는 천년을 꿈꾼다>를 보고

등록 2001.04.08 03:22수정 2001.04.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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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공간 속에서 가장 알찰 때가 심심치않게 시사(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일 검색을 하는 중에 연극동으로부터 모니터링 신청이 있었다. 대개가 영화가 많은 데 이번엔 연극이라 서둘러 사이트를 찾아 들어갔다. 그 곳에서 눈에 띄는 숫자는 4월 5일과 4:30 선착순 10명이었다. 늘 혼자 갈 것을 예견하면서 왠지 시간이 되면 다른 사람도 데려가고픈 욕심에 2명을 신청했다. 다행히 그 시간대에 인원이 절반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혜화역에서 내려 두리번거려도 대학로극장은 없다. 하는 수 없이 바탕골 안내자에게 물으니 방송통신대학에서도 한참 가야한단다. 시간은 15분 정도 밖에 남지 않자 우린 매화향이 코를 간질이는 대학로 길을 뛰었다. 일상이 무료하다며 아이구 타령을 하는 후배의 손을 잡고 도착하니 아직은 입장하지 말란다. 대개가 그렇듯이 관람시 주의사항을 일러주고 좋은 평 부탁한다는 조연출의 말이 있었다.

부제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달고 있는 이 연극은 퓨전 연극(fusion drama)이다. 리얼리즘 연기와 표현주의적 이미지가 함께 어우러진. 작품 곳곳에 나타나는 환상적 장면과 손과 소품을 함께 한 무용, 타악기, 우리 가락과의 만남, 바라춤과 풍경소리가 적절히 느껴지는 정서의 연극이다. 그들이 관객의 "정서의 흔들림"을 추구한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허름한 가방 하나 들고 후줄그레한 모양새에 두터운 안경을 쓴 남자 동혁. 육담도 아닌 것이 전라도 사투리의 구성짐과 가슴이 확 터져버릴 것만 같은 웃음을 가진 벌교댁의 살가운 손님맞이로 연극은 시작된다.

어쩐지 음산한 방에서 동혁은 죽은 아내와의 시절을 떠올린다. 담배에 불을 붙이기위한 라이터 켜는 소리의 반복과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데, 무대 왼켠으로 북소리가 현실감을 더해준다. 한 때 잘 나가던 소설가인 동혁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창작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어 해남 땅 달마산장에 투숙하게 된다.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벌교댁의 친절은 극의 어두운 부분을 밝게 하는 역할을 하는 데, 마치 향단이를 보는 듯하다. 어느 날 산장에서 훤히 바라다보인다던 미황사를 찾게 되는 동혁은 그가 습작기를 끝내고 글로써 유명해지기 전 깨달음을 얻었던 스님을 찾아 자신의 말라버린 창작욕을 찾으러오지만 면벽수행에 들어갔다며 "대문을 연다고 콧구멍 없는 소가 들어오겠냐"라는 화두를 던지는 해운의 소리를 듣고 무거운 짊을 내려놓기보다 더 혼란스러움을 안고 산장으로 돌아간다.

한편 잦은 기침의 산장 주인은 동혁 못지 않은 수심을 안은 채 예사롭지 않은 생을 보이는 데, 사이사이 그녀의 지나온 삶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 극이 표현주의 극임을 나타내는 듯 하다. 그녀의 등에 새겨진 나비 문신의 정체. 결국 동혁은 사람들이 많이 자살한다는 사자봉 이야기를 벌교댁으로부터 듣고 자살을 계획하지만 벌교댁과 주인 여자 여정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어느 날 주인여자는 술 한 상을 차려와 그녀의 내력을 들려준다. 지겹던 삶으로부터 탈출하여 온 곳에서 또 다시 새로운 비상구를 찾아야했던 주인여자에게 단 하룻밤의 인연을 맺고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 가슴앓이를 해온 그녀는 결국 모든 재산을 미황사에 맡기는 데, 공교롭게도 그녀의 하룻밤 인연은 미황사의 주지 해운이었다. 결국 그 여자는 사자봉에서 몸을 날려 죽음을 맞이하고 정작 죽으려했던 동혁은 주인여자 여정의 하룻밤 인연이 해운임을 알기라도 한 듯 그 여자가 남기고 간 나비 목걸이를 미황사에 놓고 온다. 그것을 안 해운이지만 그 또한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극 중에서 가끔 산장 주인인 여정이 부르는 노래는 이광수의 원작인 꿈 속에 나오는 여자의 노래 가락 같다. 인생은 한바탕 꿈과 같은 것이라고 힘없이 외치고 있다. 처음처럼 턴테이블 위로 날아다니는 나비. 그 나비는 여정이요 동혁의 아내요 동혁이요 해운이요 나, 또 그것을 보는 이일지도 모른다.

아내의 죽음, 창작고의 고갈, 삶의 회의, 한 여자의 지독한 운명적 사랑, 돌고 도는 인연의 끄나풀. 어쩌면 여정의 죽음은 미완성인 사랑을 완성하려한 그녀의 탐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완성이 완성임을 모르고 있던 것처럼. 보통 사람 같으면 달려가 품에라도 안겨보기라도 했을텐데. 잔잔히 흐르던 우리 가락과 붉은 가사를 입은 스님의 바라춤, 둥둥 북소리, 여정의 가냘픈 노래, 손가락을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한 무용. 벌교댁의 가식없는 정.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슬픔이 지속되지 않고 가끔은 끊어짐의 맛을 보게 한 구도적 성격의 연극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하룻밤의 인연을 청승맞게 이십 년이 넘도록 앓느냐고 섣불리 말할 수도 있지만 세상엔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곧장 그 길로 가지 못하고 돌아서 가야만 한 일들이 수없이 많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일들이 말이다. 어쩌면 인연이 그런 것이 아닐까.

연상작용이 많은 나는 연극 속에 몰입되어 참으로 많이 울었다. 내 주위엔 자신을 묶는 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까지도 묶으려드는 이들이 제법 있다. 자신을 놓기도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것은 얼마나 무상하고 부질 없는 일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문학을 전공한다면서 내게 "영문(靈文)"이 보인다면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다며 한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자신은 물론 나를 구원하는 일이라 굳건히 믿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지금 삶의 이유를. 단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매일 저녁 살아온 하루를 얼마만큼 잘 살아왔는 지 점검하고 잘 죽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날 내일이란 이름표를 달고 하루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 색채가 짙은 연극이다. 주제도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이 모두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으킨 것이다. 하룻밤이었을망정 평생을 가슴에 앓아온 그 것은 바로 생명의 끈질김과 사랑의 완성을 보여준다. 죽음으로써 미완성을 완성시킨 삶. 결국 부질없는 생이다. 탐심은 자신의 번뇌를 늘일 뿐이요 내려놓는 일에 힘쓸 일이라는 걸 가르쳐주는 연극이다. 요즘처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축 처진 어깨에 종교적 구도의 자세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항상 심각해 있을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삶의 존재 근거에 대한 혼자만의 동굴 속 여행이 필요하다고 본다.

연극적 장치에서 아쉬웠던 것이 있다면, 해운의 결가부좌가 잘못되었다는 것과 여정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처럼 술과 밥이 제대로 된 상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가끔 퓨전 음식으로 삶의 빛깔을 달리해보는 것처럼 퓨전 연극도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나와 상쾌해질 수 있는 활력소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욕구가 어떤 이에겐 사치가 아니냐는 지적도 받을 수 있지만 죽고 사는 일에 밑생각이 된다면 그리 사치스러운 것도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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