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바람이 분다.
아침 창문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보니 오늘도 비로 시작하려나 보다. 11시가 다 되어 숙소를 나선다. 모래 떠날 니스를 위해 장을 봐야 하는데 식단도 짜놓지 않았다. 환전할 때가 되었는지 지갑이 텅 비었다. 여행자 수표를 몇 장 들고 나서는데 후배가 비행기 예약에 문제가 있다며 여행사에 가야 한단다.
<오페라>를 향해 가는 길에 여느 때처럼 53번을 타는데, 비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오른팔에 길다란 우산을 들고 머리엔 비 맞지 않으려는 듯 모자와 두건을 둘렀다.
버스에 오르니 거짓말처럼 비가 내리지 않는다. 프랑스는 날씨조차 사람을 놀린다. 시차 적응도 아닌데 비가 와서인지 스르르 잠이 온다. 그도 그럴 것이 창문에 기대니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짧은 비여서인지 세느강은 바람따라 유유히 흐른다. 한가롭게 강가를 거니는 사람들,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귀고 개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풍경은 어느 곳에서나 흔하다.
오페라에 도착하니 다시 비가 온다. 오버트라우저를 입고 환전소를 향한다. 오페라 근처,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환전소다. 우리는 여행사에서 알려준 곳보다 더 비싸게 환율을 적용하는 곳을 찾았다. 오늘도 여전히 다른 곳에 비해 높다. 74달러를 계산해보니 534.28F이다. 처음 환전했을 땐 7.32달러였는데 오늘은 7.22달러다.
샹젤리제 거리로
샹젤리제 거리로 나선다. 바 레스토랑이 많은 거리.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은 당연하다. 얼마쯤 걸어가는데 우리나라 사람 비슷한 여자가 내게 일본인이냐 묻는다. 한국사람이라고 했더니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면서 뤼비똥 가방을 사줄 수 없냐고 묻는다.
여행 첫날 콩코드 광장을 지날 때 어떤 여자가 다가와서 한국인 여행자냐고 물어서 뜬금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후배가 뤼비똥 가방을 대신 사주는 아르바이트를 찾는 사람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그 땐 무슨 나라 망신이다 싶고 께름칙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아르바이트가 취재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후배는 학생비자였고 여권도 가져오지 않아서 나 혼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내가 아르바이트에 응하자 이 아줌마는 얼굴이 활짝 펴진다. 그리고는 내게 방법을 일러준다. 어떻게 카타로그를 외웠는지 자신이 찾는 가방이 있는 쪽수와 돈 만 프랑을 건네준다. 여행자 수표와 현금을 적절히 분배해서... 게다가 내가 여행자 수표를 사용하는 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사인하는 곳까지 일러준다.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서투른 영어와 후배의 불어 실력을 믿고 들어가보기로 했다. 우리 근처엔 이미 일을 하고 나온 우리나라 여행객 남자가 아직 일을 마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에게 "좋은 일인가요?"하고 묻자, 살픗 웃어보이며 "글쎄요. 그런 거 잘 모르겠는 걸요"하며 겸연쩍어 한다. 정말 비오는 화요일 오후에 우울한 샹송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다.
후배의 카메라를 꺼내 들고 우린 여행자 차림으로 들어갔다. 후배 말에 의하면 어떤 직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살 수 있는 가방의 양이 달라진다고 했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많은 양의 가방을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하나의 가방만 사올 수 있단다(특히 처음 가는 경우엔 잘 차려입고 말발이 좋은 사람이 많은 양을 사 올 수 있단다).
아르바이트 대가로 내가 받을 비용은 가방 값의 10%였다. 그런 까닭에 가장 비싼 가방을 고르는 일이 아르바이트비를 많이 받는 것이다.
어쨌든 가방을 살 때는 그저 필요에 의해 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어떤 때는 사람이 밀리면 가게 밖에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파리에 와서 몇 번 본 풍경이다. 오늘은 운 좋게도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에서도 예닐곱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직원들이 보지 않은 틈을 타서 사진을 몇 장 찍어뒀다.
한 오분 기다려 섰는데 홀쭉한 남자 직원이 와서 아래 층에 가서 보라고 한다. 후배와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그 곳에서도 1층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붐빈다. 카타로그엔 당연히 가격이 붙어 있지 않고 모델과 모델명, 크기만이 적혀 있었다.
가방을 사오길 부탁한 상인들은 중간상인인 듯싶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유명 백화점에 있는 뤼비똥가방의 가격은 도대체 얼마인가.
자리에 앉아, 중국인으로 보이는 이와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무슨 일인지 처음 방문도 아닌데 가방 하나를 못 사고 나간다. 후배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한참 기다리자 여직원이 다가왔다. 그녀는 기분 상한 듯한 얼굴이다. 여직은 미안하다며 모델을 말하라 한다. 여직은 내가 처음 가리킨 것을 찾으러 갔지만, 이내 세 가지 종류 중 멜빵 가방 하나만을 가져왔다. 다시 다른 가방과 함께 손에 드는 지갑을 골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손에 드는 지갑 하나만 달랑 가져오면서 내가 찾는 가방이 매장에 없다고 말한다. 바로 옆에선 그 가방을 사고 있는데도 말이다.
후배는 종종 있으면서 없다고 하거나 우리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하면 잘 안판다고 말했다. 또 직원이 팔기 싫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팔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앞에 있던 남자는 신혼여행을 왔다는데 신부는 없고 커다란 가방 하나를 사가지고 나갔다.
결국 멜빵가방과 손지갑을 사기로 했다. 서투른 영어와 후배의 불어 솜씨로 영수증과 함께 6100F을 치르고 나왔다. 매장을 빠져나오니 문 밖에 섰던 아줌마가 잽싸게 달려온다. 나머지 3900F을 돌려주고 수수료로 610F을 받았는데 왠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또 다른 여행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줌마는 후배더러 내일 시간이 되면 사줄 수 없겠냐고 말했다. 그저 가방일 뿐인데 우리나라에 가면 백만원을 넘어설 것이 아닌가. 도대체 그 가방은 사람의 어떤 부분을 채워주는 것일까.
화장실을 가기 위해 근처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과 샐러드를 먹는데 아무 느낌이 안난다. 얼얼한 것이 마치 몸에서 진기가 다 빠져나간 듯하다. 역시 내키는 일을 하지 않은 뒷물이지 싶다. 보온물병에 싸온 커피가 오늘따라 쓰다.
돌아나오면서 후배가 가야 하는 여행사를 찾아 헤맨다. 덕지덕지 붙은 건물 속에 그냥 번지 수만 갖고 찾기는 힘이 드는 모양이다. 겨우 찾아가니 프랑스인 남편과 우리나라 여자가 함께 경영하는 곳이다.
12살 된 딸의 만화 그림이 붙어 있는 사무실이 마치 작은 자기들의 집 안 같다. 뤼비똥 이야기를 하니 재주도 좋다면서 다들 하는 거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 여행자들은 한번씩 거쳐가는 아르바이트인가보다.
물질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메이커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는 한 별다를 문양도 아닌 그저 평범한 가방 뤼비똥 아르바이트는 계속 될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적을 묻는 동양계 사람들을 또 다시 만난다. 거의 뤼비똥 가방 사줄 수 있냐는 물음이 그 다음이다. 이미 했다고 했더니 다른 곳에 가서 사보는 건 어떻겠냐고 한다. 그야말로 낯이 뜨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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