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정신은 '증오' 아닌 '사랑'

<정치인과 저서 - 5.18관련>

등록 2001.05.11 23:45수정 2001.05.1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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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람들의 한, 이것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한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것은 한국인의 한일 뿐만 아니라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염원하는 세계의 양심있는 모든 사람들의 한입니다. 이 광주의 한이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책임 그리고 우리 민족의 소망인 민중·민족·민주의 원망에 대한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광주 사람들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의 메카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온 세계의 뜻있는 사람들의 기둥이 되는 그런 곳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김대중,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중)

또 다시 계절의 여왕 5월이 찾아왔다. 그러나, 80년 광주에서의 참혹한 군화발에 대한 기억과 무수히 쓰러져간 사람들의 영령은 여전히 우리 마음속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이미 국민들의 합의 속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의미가 승격됐고 그 항쟁의 중요한 계기가 됐던 김대중 대통령이 국정운영의 책임자로 있지만, 떠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고 있다.

5·18 21주년을 맞아 여야 정치인들 뇌리 곳곳에 깊이 각인돼 있는 의식들을 엿볼 수 있는 저서들을 살펴봤다.

'민주화 운동의 스승'

지난해 4월, KBS 방송문화연구원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에 관해 20세 이상 남녀 10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바 있다. 이 결과 가장 많이 지적된 것이 '광주민주화운동'(30.2%)과 '4·19혁명'(23.9%).

이는 5·18과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청문회 등 수많은 진실규명의 작업을 통해 80년 당시와 비교할 때 상당히 변화됐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민주연합론'을 거론하며 여권 내 개혁세력을 대표하는 차기 주자인 김근태 최고위원은 재야 시절인 지난 87년 발간한 <남영동>(중원문화)에서 '광주민중항쟁'을 '민주화운동'의 스승으로 평가했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이 생동하는 실체이고 폭발하면 무한한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줬으며 앞으로의 민주화 운동이 반외세·반독재 민중투쟁이어야 함을 제시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이어 7년 후인 92년, 감옥에 있을 때의 서간문을 모은 <우리 가는 이 길은>(도서출판 새날)에서도 김최고는 5·18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5월 광주항쟁은 참혹한 죽음이었고 좌절이며 패배였네. 또한 공포였고. 그러나 그런 처참함 안쪽에 다시 타오르기 시작하는 부활의 불길이 살아있었네. 도덕성에서, 정당성에서, 그리고 민중성과 민족의 자주성에서 그렇네. 광주는 우리 모두의 희망이고 고향인 것을 다 느끼고는 있었네."


이처럼 '민주화 운동'의 우뚝 선 봉우리로 자리매김한 '5·18'은 반미의식의 태동이라는 점에서도 우리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80년 당시 한국정치문화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김대통령과 함께 신군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김상현 전 의원이 92년 펴낸 <믿음의 정치를 위하여>(학민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 전 의원은 이 책에서 광주민중항쟁이 8·15 해방 이후 한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는데 특히 주목을 한다.


"80년 당시 정권은 민주시민과 학생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 결과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참혹한 희생을 빚어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든지 광주 사태는 한국 현대사에 가장 불행한 사건의 하나임에 틀림없으며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해 미국이 도덕적인 부채를 지고 있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즉 오랫동안 혈맹으로만 국민들에게 인식됐던 미국이 일부 독재세력을 편들어 부도덕한 행위를 감행하게 했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대학가의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반미의식을 태동시켰다는 것.

이외에도 김전의원이 85년 펴낸 <80년·서울·봄-유신붕괴와 지성의 목소리>(다리)라는 저서도 당시의 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저서다. 김대통령과 이미 세상을 떠난 문익환 목사, 함석헌 선생을 비롯 김동길 교수 장을병 의원 한완상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이홍구 전주미대사 등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광주의 십자가

정치인들과 관련, 자신의 회고록이나 서간문이 아닌 아예 책 전체 분량을 '5·18'에 할애한 경우도 있다.

민주당 김영진 의원의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하>(동명출판사)가 그 대표적인 경우. 김의원은 89년 펴낸 이 책의 머리말에서 "나는 이 책을 펴내면서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을 쉬임없이 오르던 시몬을 생각한다.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무등산을 넘어오는 광주의 십자가를 이제 우리가 대신 짊어져야 할 때다"며 "타인의 죽음을 담보로 시대의 오도된 영광을 끌어안고 추악한 모습으로 웃는 자들에게 이제까지 보다 더 준엄하게 광주를 되물으면서 아직 다 이루지 못한 광주의 남은 부분을 채워 가야 한다"고 비장한 마음을 드러낸다.

90년 돌베개에서 나온 <광주민중항쟁-다큐멘터리 1980>도 5·18이 우리 현대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지 잘 보여주는 저서다.

"우리는 이 책에서 미국 행정부가 신군부의 쿠테타와 광주항쟁 유혈진압을 '묵인' 또는 '방조'했다는 등의 표현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런 표현은 미국 행정부가 그것을 저지하거나 응징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기대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기대는 실제 존재했던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한미관계의 실상에 전혀 어긋나는 터무니없는 환상에 불과하다. 미국 행정부는 신군부의 쿠데타와 광주항쟁 유혈진압을 묵인 또는 방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지원하고 지지했다"는 인식은 김상현 전의원의 인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강경한 그것이다.

80년 당시 광주항쟁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고, 87년 5. 18광주민중항쟁 동지회장을 역임했으며 13, 14대 의원을 역임했던 정상용 전의원(현 한국문화진흥 사장)을 비롯, 민주당 이해찬정책위의장, 조홍규 전의원(13-15대), 시사평론가 유시민씨 등이 함께 저술했다.

박찬종 전의원(9-10,12-14대)의 <광주에서 양키까지>(86년 일월서각), 이철 전의원(12-14대)의 <5공화국의 사건들-폭압과 비리의 7년>(87년 일월서각)도 80년 '광주민중항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책들이다.

'광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5·18항쟁과 관련, 또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정치인들의 발자취도 있다. 항쟁 당시 광주 현장 취재를 직접 담당하다 후에 정치권에 몸담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기자협회와 무등일보, 시민연대모임이 80년 당시 내외신 기자들의 취재수첩을 담아 97년 펴낸 <5·18 특파원리포트>(풀빛)를 보자.
조선일보 기자로 항쟁을 취재했던 서청원 의원을 비롯, 문화방송 사회부 기자였던 오효진 자민련 충북 청원군 위원장,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였던 김충근 전국민회의총재권한대행 언론특별보좌역 등의 글이 포함돼 있다.

먼저, 오위원장은 이 책에서 "항쟁 기간 내내 취재반장의 자격으로 광주에서 눈물을 흘리며 취재했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눈물을 흘리며 실상을 보고했다며 듣는 이들도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그 해 5월 군부철권 통치자들의 총부리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의연히 일어난 광주시민들은 조국을 사랑했고, 민주주의를 사랑했고 광주를 뜨겁게 사랑했다. 5·18 정신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80년 5월 17일, "광주가 심상찮다. 곧바로 광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떠났던 김 전보좌역도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내 자신이 기자로서 갖추어야 할 표현력의 부족을 얼마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도 그 때 뼈저리게 체험했다'는 말로 당시 상황의 심각함을 대신했다.

이후 96년 1월, 15대 총선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서 출마했던 그는 지역구내 호남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광주의 한, 호남의 응어리를 정치가 풀어 주리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정치와 정치인에 의지하면 여러분의 한과 응어리는 더 굳어질 것이고 80년 광주의 혼불은 오염돼 마침내 퇴색하고 말 것입니다"

''탕' '탕' '탕' 고막을 찢는 총성이 금남로를 뒤흔들었다'로 시작되는 글의 주인공인, 서의원도 눈으로 본 것보다는 가슴으로 느낀 것들이 더 많았다는 말로 당시의 상황을 요약한다. 총칼에 맞서 일어난 민주항쟁은 결국 총칼에 짓밟힌 채 그렇게 무참하게 끝이 나고 말았지만, 혼란의 와중에서도 끝까지 슬기롭게 대처한 광주시민의 높은 시민의식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그의 결론.

그러나, 취재진들의 당시 기사가 신문에 반영되기란 불가능했다. 항쟁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장이었던 김대중 주필이사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는 기사와 사진을 보도할 수 없었다. 계엄당국에 의해 '광주'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신문방송에 관한 한 '광주'는 17일부터 21일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21일에 가서야 우리는 광주에 '소요'가 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발표는 사실을 기만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5월 항쟁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 부국장이었던 최병렬 의원은 같은 해 11월 편집국 국장을 맡았고 한국일보 기자였던 안택수 의원은 같은 해 1월부터 3월까지 한국기자협회회장(19대)을 지냈다.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도 항쟁말기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오위원장은 적고 있다.

그로부터 스물 한 해가 지났다. 그러나, 80년 광주민중항쟁이 민주화운동의 전환점이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에는 대체로 인정하면서도 그 희망이 실현됐는지에 대한 물음엔 여전히 회의적인 대답이 많다.

항쟁 당시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취재를 했던 이들 중 일부가 모두 정치권에 들어와 있다. 그러나, 5월 현재의 우리 국회는 과연 80년 광주의 영령들에게 부끄럽진 않은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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