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거 점순·을용 부부 '화촉'

민관군경 합동으로 치른 평화마을의 영호남 부부 결혼식

등록 2001.05.21 16:41수정 2001.05.2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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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 채 객지생활을 해야 했던 용접공 을용(35) 씨, 못 배운 한을 떨치기 위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을용 씨는 10년 전에 아내 점순(35) 씨를 만나 외로움을 삭였습니다.


섬진교 다리 건너 전남 광양 다압면이 고향인 점순과 하동이 고향인 을용은 섬진강 다리를 오가며 푸른 강처럼 풋풋한 사랑을 키우다가 단칸방 월세로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가난의 설움을 떨치기 위해 열심히 노동하고 살림하며 살았지만 워낙 빈손으로 시작한 탓에 부귀영화와 결혼하지 못하고 가난과 동거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울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던 을용 씨는 IMF로 실직돼 고향 하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실직의 불안에 시달리던 을용 씨는 가족부양을 책임지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 끝에 보일러 기사자격증을 따냈습니다.

하동 읍내 목욕탕에서 보일러 기사로, 여탕 종업원으로 일하던 을용·점순 씨 부부는 평화마을 입주자로 선정되면서 평생 꿈이었던 내 집 마련의 소원도 성취했습니다. 이제 철웅(10 하동초 4년), 아름(9 하동초 3년)을 데리고 더 이상 쫓겨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을용 씨는 올해 초 목욕탕에서 실직되는 어려움도 맛보았지만 다행히 용접기술이 있어 광양제철 관련 업체에 일용공으로 취직하면서 다시 가장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러나 지난 4월경 평화마을 주민 가운데 동거살림을 하던 자녀가 결혼식을 치르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지 못한 죄스러움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쫓겨다녀야 했던 을용·점순 씨 부부, 그 가난 때문에 자녀가 어엿해지도록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아야 했던 동거부부의 아픔이 오월의 섬진강을 맴돌았습니다.


이들 부부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평화마을 자치회는 머리를 짜냈습니다. 없는 돈에 멋지게 식을 치러줄 방법은 없는지, 그러나 수소문을 한 결과 가난의 아픔을 기쁨으로 보듬기 위한 마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날짜를 잡고, 청첩장을 돌리면서 영호남 부부의 결혼추진이 시작됐습니다. 마을 입주 이래 가장 큰 경사를 앞두고 소소한 잡음도 있었지만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습니다.


철웅이 아버지 결혼식에 마을 주민들이 손을 걷어부쳤습니다. 아이들은 만국기와 풍선으로 결혼식장을 예쁘게 꾸미는데 손을 보탰고, 인테리어 목수인 형욱 씨는 고향 후배를 위해 정성껏 무대를 꾸몄고, 부녀회원들은 돼지고기를 삶고 회무침을 하고 비빔밥을 장만하며 손님맞이를 서둘렀습니다.

어제(20일) 평화를 여는 마을에서 멋진 야외결혼이 열렸습니다. 가만히 보니 무슨 합동작전 같은 형식이 됐습니다. 결혼식은 <민·관·군·경> 합동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습니다.

광양시직장협의회(회장 민점기)는 이들 영호남 부부의 늦깍이 결혼식을 돕기 위해 전면에 나섰고, 안택수 광양경찰서장님은 주례를 맡아주셨고, 광양부대장님은 맥주와 음료수를 보내 측면 지원을 했습니다.

영국 황실에 못지 않은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촬스 황태자보다 잘생긴 을용 씨와 고(故) 다이애너비보다 이쁜 점순 씨는 두 자녀를 앞세우고 결혼식장으로 입장했습니다.

꽃바구니의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함께 입장하는 철용·아름이 남매는 너무 멋진 엄마·아빠 모습에 신이 났고 인근 원동부락 주민을 비롯한 하객들은 웃음과 박수를 보태며 아낌없이 축복을 보냈습니다.

성혼성언문과 결혼서약 낭독으로 백년가약의 축복을 빌어주던 안택수 경찰서장의 주례가 이어졌습니다.

"(전략)...무더웠던 지난 여름 전세계에서 모인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땀과 정성으로 건설된 마을에서 뜻깊은 사랑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한 쌍의 원앙이 있었고 그들은 오늘 이곳 평화의 마을에서 전세계 해비타트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있습니다."

서장님은 그 어떤 폭풍이나 눈보라 속에서도 꺽이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근면·검소한 습관을 기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칭송 받는 가정이 되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딸의 결혼식을 지켜보던 점순씨 아버지 강만석(65) 씨는 끝내 눈물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딸의 결혼을 축복해야 할 아내가 결혼식을 못보고 작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을용 씨 또한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에 형님이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야 했습니다.

주례사가 끝나자 광양시직협 섭외담당 유관표 씨는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곡을 트럼펫 연주로 멋지게 뽑아 섬진강과 백운산의 자연 하객들의 성원을 불러모았고 사물놀이패 '하늘소리'의 축하공연은 하객들의 흥을 돋구웠습니다.

광양시장, 광양시직협 고문, 청솔회(광양시청여직원회)의 선물도 전달됐습니다. 사진작가인 신영식 씨 부부의 큰 도움을 평화마을 주민들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광양읍내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들 부부는 신부드레스와 폐백의류, 사진, 비디오 촬영 일체를 무료로 후원해주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광양시직협은 모녀가정에서 어렵게 학업에 열중하는 미선(하동여고 1년) 양에게 장학금을 전달해 주면서 용기를 북돋워주기도 했습니다. 또 무주택서민의 집 장만을 위해 인생을 헌신한 해비타트 황순아 간사님, 이순영 총무님이 결혼축하와 함께 주시고 간 축하금과 자치회 지원금은 쉽게 갚을 수 없는 격려의 봉투였습니다.

난생 처음 치르는 결혼식에 혼이 빠진 을용·점순 씨는 마을회관에서 폐백을 마치고 첫 날밤을 맞기 위해 경주로 떠났습니다. 만국기와 오색풍선이 날리는 마을 잔치마당에는 하객들의 발걸음에 감사하는 소주와 돼지고기가 왁자하게 차려졌고, 손님치레에 바빴던 주민들은 뒷정리를 마친 뒤 밤늦도록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면서 '잘 살아보자'고 다짐했습니다.

평화마을 주민들은 가난한 부부의 설움을 아름답게 풀어주신 광양시직협 공무원들의 주민사랑과 백년가약의 축복을 빌어준 광양 경찰서장님의 진정한 봉사를 오래 기억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결혼에 속도 상하고 염려도 많았던 점순, 을용 부부는 이웃으로부터 큰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도움의 손길을 보탠 이웃들은 이들 부부들에게 큰 사례를 원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아들, 딸은 두었으니 그만 됐고 더도 말고 검은 머리 파 뿌리되도록 한 평생 행복하고 아름답게 오손도손 살아가는 부부가 되어 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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