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건 사랑 때문

알랭 레몽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등록 2001.05.22 16:17수정 2001.05.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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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알랭 레몽 지음·현대문학 펴냄)을 우리말로 옮긴이인 고려대 김화영 교수가 프랑스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요량으로 샀다는데, 도대체 어떤 작품이었기에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다 읽게 만들었고, '수십 년 동안 참았던 울음을 퍽, 하고 터뜨릴 뻔'하게 했을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조차 눈물을 흘리지 못했던 한 소년이 이제 그 아버지의 나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은 나이가 되어 담담하게 지난날을 반추하는 작품 속의 주인공이 꼭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것 같아서일까.


빛 바랜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 작품은 쉰 세 살의 중년 사내가 문득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과 그 낡은 집을 떠올리면서 시작된다. 가난했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았던 시절, 늘 환한 햇빛이 비추는 것과 같았던 날들을 뒤로 하고 이제는 석양 속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의 추억담이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담담하게 펼쳐진다.

부모와 자식 열 남매, 합이 열 둘이나 되는 대식구가 단칸방에서 북적대다가 '계단이 있고 방도 세 개나 되는' 집으로 이사 가면서 느끼는 행복, 수도가 처음 들어오는 모습에 신기해 하고, 토끼와 닭을 키우며 숲으로 낡은 성으로 뛰어다니며 아무 걱정 없이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는 풍경이다.

옛집에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산다는 얘기를 들은 주인공은 '그 집에 살면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고 너무 지독하고 너무 찐해'라고 추억하는 데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초라한 집에서 넉넉치 않은 살림에 고달픈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어떻게 그토록 행복할 수 있었을까고 자문한다. 비록 가난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인 바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과묵하다 못해 남처럼 느껴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심하게 성장통을 겪은 주인공은 자녀들의 의지가 되었던 어머니의 죽음, 가장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울증으로 고통받던 누이의 자살 등 이어지는 비극에 슬퍼한다. 그러다 남은 가족들은 그 집을 팔고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다.

주인공 역시 대도시 파리와 외국 등 낯선 세상과 만나면서 자신의 고향과 어린 시절과도 이별한다.


만남보다 작별이 더 익숙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샤토브리앙의 글 중 한 구절인 살아간다는 건 익숙한 사람이나 장소와 끊임없이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이라는 쓸쓸한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살갑게 못했던 것을 후회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겉으로 내놓고가 아니라 어물어물 서투르게 속으로 말'하는 이들 가족의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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