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저서> 권력의 총칼보다 무서운 어머니의 회초리

가족에 대한 애정과 미안한 마음 담은 정치인 저서들

등록 2001.05.30 10:31수정 2001.05.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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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공원의 벤치에서 두손을 꼭 잡고 앉아있는 노부부의 모습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다. 어린이날을 맞아 부모와 함께 나선 놀이동산서 맘껏 뛰노는 어린 아이들도 더없이 보기좋은 광경이다.

해마다 어버이날이 되면 정성스레 준비한 꽃과 선물을 부모님께 안기는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의 모습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족'을 중요시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개점휴업 상태인 5월 국회로 국민들의 따가운 지탄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정치인들도 각자의 가정에선 중요한 일원일 수밖에 없다. 어느덧 저물어가는 '가정의 달' 끝자락을 맞아 그들의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저서들을 모아봤다.

오늘은 1979년 6월 3일/오후 7시/금방 취침 나팔이 불었습니다//
철문은 굳게 닫혀져/내일 아침까지 나갈 수 없는 독거수로 있는 나는//어머님의 여윈 모습을 생각하며 팔십 노모에 죄스러움을 거듭거듭 사죄합니다//어머니/어-머-니
(손주항, <사모곡>)

손주항(9,10,13대) 전의원이 지난 89년 펴낸 시집 <어머니>(글빛사)는 가족 사랑의 여러 단면을 잘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회상하는 글을 보자.

'우리 어머니께서는 평범한 촌로이셨습니다. 농사일에 밀리고 쫓기어서 언제나 서성거리며 밭두렁 논두렁을 누비시기에 찌달린 아낙네였습니다. 밤이 되기가 무섭게 등잔불을 끄고 사지를 방바닥에 내던지고 곤하게 깊은 잠에 빠지시는 어느 촌구석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어머니였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어머니상이지만, 그는 자신에게 있어 태산같은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땅에 엎드려 사느니보다는 차라리 하늘을 쳐다보고 죽는 편'을 가르켜준 여장부로서 나의 어머니 이전에 스승이셨던, 산만큼 바다만큼 크게 보이는 여자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회초리와 눈물'은 '권력의 총칼이나 가시관을 쓰고 불길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어머니의 회초리)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정이 듬뿍 담긴 시도 담겨 있다.

호강이나 사치와는 인연이 없는
여자이지만
자식을 위해선 진한 정을 아낄 줄 모르는
여자.


민주화 소리가 나올 때마다
교도소를 제집 드나들 듯하는
남편을 둔 죄로
단잠 한번 곤히 자보지 못하더니
언젠가는 내가 쓰다가
내팽개쳐버린 돋보기 안경을 쓰고는
이렇게 밝을 수가 없다고
세 살 어린애처럼 좋아라 또 잠을 설치는 여자.

예쁘지는 않아도
복스럽고
희지는 않아도 곱기만 하던 내 아내의 얼굴에서
그 날 나는 처음으로 주름살을 보았다.
<아내의 주름살>

이외에도 양경자(12-13대) 전의원은 부친이 남긴 300여편의 가사를 정리해 펴낸 <아버님, 아버님이시여!>(법조각)에서 회한이 된 불효를 달랬으며, 황규선(15대) 전의원도 모친의 고희를 맞이하여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미성출판사, 92년)라는 표제로 문집을 낸 적이 있다.

한편 박석무(13,14대) 전의원은 여러 기록들을 통해 역사상 훌륭한 어머니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의 모친 사임당 신씨, 서포 김만중의 모친인 해평 윤씨, 퇴계 이황의 모친 박씨 등 조선 시대 33명 어머니들의 삶을 정리한 <나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현대실학사)를 지난 98년 펴낸 바 있다.

역시 어려운 건 '자식농사'

많은 정치인들은 대개 자신의 인생역정과 정치철학을 담은 에세이집을 가지고 있다. 평론집이나 전문서적류에 비해 일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자신을 알리는 좋은 수단이기도 되기도 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이런 에세이집의 제목 중 가족과 관련된 것이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난 84년 발간된 김동길(14대) 전의원의 <들어라, 딸들아>(청년사)라는 책이다. 독신이면서도 주독자 대상인 젊은 여성들을 '이 땅의 아름다운 딸들'이라고 칭함으로써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김전의원의 책이 실제 가족이 아닌 막연한 대상을 상대로 쓰여진데 반해 실제 가족들에 대한 제목을 가진 에세이집도 많다. 노무현(13,15대) 고문이 94년 펴낸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는 익살스런 제목부터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정치활동에 무관심한 아내에 대한 투정과 기대가 물씬 풍기는 이 책에서 노고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내의 논리도 여러 가지이다. 남편이 정치를 한다고 여자까지 나서는 것은 보기가 좋지 않다거나, 가정을 노출시키는 것은 사생활 침해란다. 또 어떤 때는 한술 더 떠서 "당신이 정치 안 하면 한 달 수입이 얼만데, 당신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애국 충분히 하고도 남았어요"라던가 "언제 당신이 아이들 챙겼어요? 나라도 챙겨야지요" 매사에 이런 식이다.'

정치인을 떠나 한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느끼고 있는 소탈한 이야기들도 부드럽게 다가온다.
'처음엔 문학을 좋아하는 고상하고 품위있는 여성인줄 알았는데 결혼하고 나니 주인으로 군림한다'거나 '결혼은 곧 신비'라는 그의 부부생활론은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친근한 그것이다. 아내가 자신을 구박할 때는 언제나 아이들 이야기를 내세운다며 그간의 경험을 통해 '교육은 부모가 좌지우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자기고백도 '자식농사'의 어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차라리 '정치'를 포기

문정수(12-14대) 전의원이 95년 펴낸 책의 제목도 <아빠, 집에 안가?>(고려원)다. 70년대 말 YH사건 항의 농성으로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접선하듯 어렵사리 성사된 가족들과의 만남에서 자꾸만 옷소매를 잡아끌며 딸이 되풀이했던 말에서 연유됐다.

민주투쟁을 핑계삼아 손 한번 변변히 잡아 준 적 없는 자녀들과 여전히 약국을 경영하면서도 매주말 아니면 격주마다 부산에 내려가 여성당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등 여성 조직을 전담해온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썼다는 게 저자의 말. 도피생활을 하며 눈을 감기가 두려울 만큼 새록새록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가족들이 그리웠다는 그의 회고도 눈길을 끈다.

또 다른 책, <아내 얼굴을 화장하는 남자>(행림출판, 99년)의 저자는 다소 의외의 인물이다. 백화점에 가 오십대 여성에게 맞는 화장품을 사는 60대 남성,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아내의 기초 화장 정도는 능숙하게 해주는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발간 당시부터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여러 여성잡지에 실리기도 했던 이 책을 쓴 사람은 다름아닌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이다. 평소 '보수 강경' 목소리를 대표하는 그였기에 아내 사랑을 담은 이 책은 더욱 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뇌졸중에 쓰러진 아내에게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 썼다는 그의 말에서 진한 사랑이 물씬 풍겨진다. 매일 매일 원고를 읽어주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회상에 잠기기도 하면서 회복되어 가는 아내와 이것을 지켜보는 남편.

평생을 살아오며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정치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며 '정치'라는 것이 족쇄가 돼 자신의 순수한 사랑과 의지가 왜곡된다면 차라리 '정치'를 포기하겠다는 대목도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사랑이야기가 담긴 정동영 최고위원의 <개나리 아저씨>(자작나무,99년)와 황산성 전의원(11대)의 <엄마는 변호사라면서 왜 그리 모자라>(인폴리오)라는 책도 가족사랑을 엿볼 수 있는 저서들이다.

가정이 잘 돼야 다른 일도 잘된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와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들은 정치인들에게도 큰 힘이 되겠지만 보는 독자들도 흐뭇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한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전체 국민들에게까지 퍼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또한 정치인들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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