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준 높은 '공짜' 음악회, 가문 날의 단비로소이다

김덕수와 황병기의 최근 연주회를 보고

등록 2001.06.18 15:33수정 2001.06.1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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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로비에 꾸며진 간이 무대

지난 6월 15일 강남 포스코 센터 로비에서 열린 '무대 밖 콘서트'에 11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김덕수와 난장 재즈 콘서트>는 포스코 센터에서 매달 열리는 무료 음악회의 하나.


플라스틱 간이의자가 빽빽이 놓인 1층 로비는 평소의 콧대 높은 분위기를 버리고 훌륭한 대중공연장으로 변했다. 관객들은 모두 포항제철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무료 티켓과 초대권을 받은 이들이다.

무료 콘서트지만 출연진은 화려하다. 사물놀이 하나로 한국음악의 세계적 위상을 세운 김덕수와 그가 이끄는 놀이패 '한울림', 그리고 재즈 밴드 '난장'과 언더그라운드 가수 '웅산'이 나와서 국악과 재즈를 혼합한 연주를 선보일 예정이었다. 거기다 영국의 여성 4인조 월드뮤지션인 '본드'까지 초대손님으로 나온다니, 관객들은 신이 날 수밖에 없다.

"포항제철 수문장 문을 여시오!"
사물놀이 공연의 전통대로 무대바깥에서 '문굿'을 하며 등장한 이들은 모두 9명. 대장 김덕수와 단원들이 징, 장구, 북, 꽹과리의 네 가지 악기를 각각이 들고 객석을 가로질러가며 연주를 한다.
'치지지징! 치지지징! 칭칭 칭칭!'
'둥둥- 둥둥-!'

사물놀이의 악기들은 저마다 하나씩 자연의 소리를 상징하고 있다. 비(장구), 바람(징), 구름(북), 천둥(꽹꽈리). 첫 번째 무대에서 연주자들은 무대에 시원한 빗줄기를 내렸다. '삼도 설장구'를 연주하는 9대의 장구에서 쏟아진 빗소리가 3층 높이의 로비 안을 가득 메운 것. 장마와 소나기, 이슬비부터 맹렬한 폭우까지 이들의 장구 소리는 비 소식을 염원하는 모든 관객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공짜'를 대하는 진지한 태도


그래서일까. 연주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태도가 그렇게 진지할 수 없었다. '난장' 밴드와 가수 '웅산'이 가세해 국악과 재즈의 퓨전 음악을 선보이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진지함에는 변함이 없었다. 목을 빼고, 귀는 쫑긋 세우고, 연주자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킨 천 여명의 관객들. 농부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에 목말라 있는 것처럼, 이날 음악회를 찾은 사람들은 수준 있으면서도 편안한 음악 연주에 목말라 있는 듯했다.

김덕수 정도의 인지도 있는 연주자라면 최소한 1, 2만원씩 하는 입장권을 구입하지 않고선 평소에 라이브 연주를 들을 기회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것도 제일 싼 좌석이라 금세 동이 나 못 구한다고 하니.


"괜찮은 연주자들이 나오는데 무료라고 하니 신문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죠."
중학생인 딸 연수와 함께 연주회장을 찾은 주부 김미형(42) 씨의 말이다. 보통의 콘서트라면 내용이 좋아도 값비싼 입장권 때문에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

"음악이나 무용은 꼭 전공을 안 하더라도 애들 교육에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연주회장을 찾는데, 사실 부담이 되죠. 오늘 같은 공연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학교에서 사물놀이를 배운 적이 있어 이날 공연도 재미있게 봤다는 연수(13). 어린 여학생의 얼굴에 신바람이 가득한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했다.

유명한 음악가 이름만 이용하는 음악가 관행 없어져야

대중 음악과 달리 국악이나 클래식 음악은 대중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예가 극히 적다. 따라서 공연 문화가 활성화되지 않는 한 일반인들이 전통 음악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입장료가 비싼 것은 물론이고, 예술성을 추구한다며 지나치게 난해한 내용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이 적지 않다.

지난 5월2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황병기 음악세계로의 여행>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가야금, 장구, 대금 등 국악기의 유명한 연주자는 물론 바이올린과 소프라노, 키보드, 현대무용과 설치미술, 액션 페인팅, 조명 퍼포먼스까지 <황병기…> 공연은 매력적인 기획 공연임에 틀림없었다. 전통과 현대, 한국과 서양의 예술형식을 망라한 이와 같은 종합 공연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드문 혁신적인 시도'라며 주최측은 자신만만해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전체 2부로 구성된 연주회 중 적어도 1부까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황병기의 가야금 곡을 새롭게 편곡한 작품들은 3800석 규모의 대극장에서 연주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음량이었다.

감동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단상과 느낌마저 얻을 수 없는 연주가 이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스크린 뒷쪽에서 붓질을 하는 '액션 페인팅'을 벌이다가 금붕어를 물 밖으로 꺼내 바둥거리는 모습을 확대해 보여주기도 했다.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에게 바친다는 '헌정 공연'의 의미는 퇴색하고 말았다. 또 관객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다가 예술과 생활의 거리감만 강조한 결과를 낳았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일반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건강한 무대였다면, 황병기 헌정 공연은 클래식(전통예술)이 특수한 집단의 전유물에 불과하다는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퇴폐적 무대에 가까웠다.

국악과 클래식 음악가들은 공연장을 찾는 사람이 적어서 고민이라고 한다. 그러나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시민을 만들기 위해서는 음악인들이 노력해야 할 점들이 아직 많다. 기업이 문화 행사를 주최하고 후원하는 일도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만 시민들도 부담 없이 연주장을 찾고 음악을 즐기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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