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때로는 시인이다

오연호 <노근리 그 후>

등록 2001.06.22 15:04수정 2001.06.25 10:36
0
원고료로 응원
예조프의 숙청이 자행되던 끔찍한 시절에 나는 레닌그라드에서 17개월 동안 죄수를 면회하기 위해 줄을 서있었다. 한번은 누군가 나를 '알아보았다'. 입술이 푸르스름했던, 당연히 살면서 내 이름이라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 여자는 내 뒤에 서 있다가 문득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무감각에서 깨어나서는 나에게 살그머니 물었다(거기선 모두가 귓속말을 했다);

"당신은 이 얘기를 쓸 수 있나요?"
"할 수 있어요" 나는 대답했다;
그때 미소와도 같은 그 무언가가 한때 그녀의 얼굴이었던 곳 위를 스쳐지나갔다. ―안나 아흐마또바, '진혼곡(1935-1940)'중 '서문을 대신한 글'


때로는 기자가 시인이 된다.위에 옮긴 글은 1937년 스탈린의 피의 숙청이 극에 달했을 때, 현장에 있었던 한 시인에 의해 훗날 기록된 장시(長詩)의 서문이다. 이때 시인은 사실을 전달하고 역사를 기록하는 기자였다. 1945년부터 1999년까지 50여 년 간 이민족 군사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한반도의 사람들은 이만큼 좋은 시인을 만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 대신 기자가 생존자와 목격자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노근리 그 후>(월간 말, 1999)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책은 미군이 한국 사람들에게 저지른 잘못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성실한 증언집이다. 이 책은 또 한 권의 '작품집'이기도 하다. 고통받는 인간의 삶을 기록한 어떠한 시도 이 책에 실린 기사들보다 더 '시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6·25 전쟁'이라고 부른다. 아직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그 전쟁의 기억을 떠올릴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살수대첩이나 청산리전투를 대하듯이 침착하게 한국전쟁을 대할 수는 없다. 아직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심각한 피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떤 보상과 조처도 취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에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발생하는 범죄의 유형은 아주 다양하다. 구타와 강간과 살인은 눈에 보이는 심각한 범죄지만, 그보다 더 큰 범죄는 바로 다른 나라 국민의 주권을 침해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범죄일 것이다.

아직도 "미군은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고마운 군대"라고 생각하는 '착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와 그의 가족은 주한미군의 <범죄일지> 명단에서 운 좋게 빠진 사람들이다. <노근리 그 후>에 '별첨'으로 나와 있는 이 일지는 장장 56쪽 분량에 이른다. 여기에는 미군의 범행방법과 이유,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스물 여덟 번이나 손가락에 침을 발라 이 일지를 넘기다 보면, 미군이 우리에게 고마운 군대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만다.

"나는 미군 때문에 억울한 인생이 된 한국인이 그렇게 많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노근리 그 후>, <노근리와 나의 20세기>중에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전쟁 당시의 참상은 아직 다 드러나지 못한 것 같다. 2001년 6월 28일자 <한겨레21>(제364호)은 '대한민국 킬링필드'란 제목으로 한국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기록을 다루고 있다. 1960년 양민학살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총8715명의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가 한국전쟁 당시의 참상을 말해주는 것이라면, <노근리 그 후>는 야만적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국인의 수난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수난을 끝내려면, 부당하게 우리의 토지를 점령하고 있는 외국 군대를 제 나라로 돌려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미군 없는 한국을 상상해 보라.
제발 상상을 하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세상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곳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불쌍한 국민들이 다시 없게 하기 위해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5. 5 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