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피난민이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가는 길

등록 2001.07.01 18:00수정 2001.07.0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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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의 주소지는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이었다. 이제는 서교동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이사의 연유는 내가 살던 집이 헐리게 된 데 있었다.


나는 합정동 로타리에서 양화대교 쪽을 보고 오른쪽으로 꺽어져 멀리 상암동으로 통하는 길 옆 2층에 살고 있었는데, 이 집이 그만 헐리게 된 것이다. 무허가주택이어서는 아니고 그 상암동의 월드컵 경기장으로 통하는 길이 두 배로 확장된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집이 헐리게 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며칠을 벼르다 카메라를 들고 나가 내가 사는 동네를 필름에 담기 시작했다. 합정동은 서울에서는 드물게 토박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고 들었다. 나도 외지인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십 년이나 살아온 까닭에 아쉬움이 컸다. 사람들이 북적대는 신촌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불과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동네라고 하기에는 한적하기 짝이 없는 동네가 바로 합정동이다.

또 홍익대학교에서는 불과 한 정거장 거리인데도 화려함과 유행이 넘치는 그곳과는 달리 로타리에 겨우 곱창집이나 도장포, 약국, 은행의 무인점포 같은 것밖에는 없는 곳이 또 합정동이다. 채 다 자라지도 못한 길가 은행나무가 겨울에 잘려 나가더니 이제 집들이 헐리고 월드컵 경기장으로 향하는 새 길이 들어서니, 합정동은 앞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이제 막 사라지고 있는 옛 거리를 바라보며 우리네 삶이 피난살이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우리들의 삶은 피난살이 삶이다. 서울을 보면 곳곳에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떡칠을 하고 도배를 하였으나 그런 모든 것들이 십 년은커녕 오 년도 넘기기 어렵다. 헐리고 새로운 건물과 길이 들어선다. 지하철 공사니 하수도 공사니 해서 길이란 길은 죄다 구멍이 뚫리고 소음이 끊일 새가 없다.

생화를 벌어대야 하는 이들의 행상 리어커와 내놓은 상점 물건들이 거리를 누더기로 만든다. 자동차들은 단속에 쫓겨 이면도로와 골목과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다. 나무판자와 바라크로 무허가집을 짓던 때와 다를 바 없는 드난살이 삶을 우리는 비천하게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문화란 아트홀과 박물관과 예술의 전당과 대학로의 지하극장에 박제가 되고 전시물이 되어 모여 있을 뿐이다. 과장인가?


내년이면 월드컵이라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국의 16강 진출이 나라의 명운을 쥔 물건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의 이목이 그곳에 쏠려 있다. 그러나 올림픽을 치르고 그랬듯이 월드컵을 치러도 우리의 삶은 피난살이에서 결코 멀리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옛 길과 집이 헐리고 새로 들어서는 것들에서 나는 어느 하나도 오래 문화가 되어 남을 것들을 보지 못했다. 합정동은 옛 것을 그 흔적마저 지우고 새 것을 채택하는 것으로, 그 일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시종할 것이다.

옛 거리와 집들을 필름에 담기는 하였으되, 내가 그 흔적이라도 남겨두려는 풍경조차 문화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부질없는 호사취미에 괜한 필름들만 소비한 것이다. 나는 이 금빛으로 치장한 누추한 나라를 살아가는 난민의 한 사람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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