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엔 왠지 기상나팔이 없었다
한국전쟁(6.25)이 나자 제주 전역에 '요시찰'인에 대한 불법적인 <예
비검속>이 단행되고, 제주읍, 모슬포, 서귀포, 성산포 등 4개 경찰
서 관내에 소나 말처럼 구금시켜뒀던 수많은 예검자들의 '사상' 등
급분류(D, C, B, A)를 임의적으로 하고, 이중 D, C급을 무참히 총
살 암매장하거나 수장하였다.
이 학살의 주체는 당시 제주 주둔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신현준,
정보참모 김두찬, 2대대장 김동하, 3대대장 김윤근)'에 의해서 자행
되었다. 물론 이들에게 명령을 하달한 상급기관은 당시 육군본부 정
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이었다. 경찰은 검속하여 사상분류를 하고
감금하는 일을 주로 하고 군은 '도살'하는 '백정노릇'을 했던 것이
다.
상기한 4개 경찰서 관내에서 무참히 도살된 예비검속자의 숫자는 모
슬포 경찰서 관내(경찰서장 강문식)만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
검된 총인원 347명 중 253명이 군(해병대)에 인계되었고, 이들 중 김
영두(현재 대전 거주, 전 제주지방 법원 판사 김영길의 동생) 씨를
제외한 252명은 총살 암매장되었다.
필자는 이 사건 당일 아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제주출신 해병
3기 진 아무게씨의 증언을 채록하고 <월간 말> 7월호에 실어 놓았
다.
진씨는 당시 모슬포 주둔 해병 3대대(대대장 김윤근)에서 훈련을 받
고 있었다. 처남과 매부가 모두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 예검되어 있
다는 것을 매일 아침마다 구보로 '신영물'에서 세수하러 가거나 올
적에 만나서 알았다. 그들은 손수레를 끌고 식수를 길러 신영물에
왔었다고 한다. 서로 말은 못하지만 먼 발치에서 눈인사만을 하곤
했다.
약 한 달 기간의 훈련을 마쳐갈 무렵 저들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
았다.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모슬포 비행장 동쪽 섯알오름이란 곳에
서 모두 총살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가족들이 면회 오기 일주일 전 어느 "아침 기상나팔이 없었다." 너무
나도 고된 훈련을 받고 있었던 몸이라 "왠 떡이냐"고 했다. 그런데
새벽에, 밤새 어디를 나갔다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분대장들이 아랫
도리가 젖어 있었고, 훈련병들에게 아무 소리도 않고, 총을 내동댕
이친 채 내무반 침상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 이 놈들이 그날 개지랄을 쳤구나"한 것을 가족들이 면회와서
비보를 전해주어서야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모슬포 백조일손 묘역 입구에 가보면 안내 표비가 있는데, 거기 내용 중 "허욱 육군대위가 이끄는 중대에 의해서"라고 된 것은 잘못된 기록이란 것을 필자는 밝혔고, 유족대표분들께 그 표비의 정정을 촉구하였다.
"허욱 육군대위는 4.3때 모슬포 주둔 부대장이지 6.25때는 없었다"고 하모리 노인회장 고춘언 씨가 필자에게 누차 말씀해준 적이 있어, 의아해 하다가 진 씨의 증언과 모슬포 해병대 3대대장 김윤근의 '자백'을 통해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제주읍 '정뜨르 비행장'에는 당시 군용 트럭 약 13대분의 예검자들이 해병 2대대(대대장 김동하, 암으로 작고)에 의해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서귀포 경찰서 관내 예검자들 중 약 230-250명으로 추산되는 숫
자가 2차에 걸쳐 해병대에 의해서 총살되었는데 아직도 그 장소가 밝혀지고 있지 않고 있다(이재준 전 교장 증언, 당시 서귀포 경찰서에 예비검속 당함).
<월간 말> 8월호에는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이었던 장도영(플로리다 올랜도에 현존, 79세)을 찾아내어 '조우'했던 스토리를 실을 예정이다. 6월호에는 해병대 정보참모였던 김두찬의 거짓말을 공개하였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린다고 그 청명한 빛을 가릴 수 없듯이' '역사
의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요 며칠전에 대전 산내면 속칭 '골령골'에서 4.3 유족들과 여수 순천 유족들 그리고 대전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제가 올려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도주하던 이승만은 수원, 부평, 대전, 전주, 광주, 대구, 김천, 부산, 마산 등지의 각 형무소에 갇혀 있던 소위 '정치범'들을 도륙하고 암매장하거나 수장해 버렸다.
대전형무소에서는 1800 명의 정치범을 처형했다는 사실을 관찰(감독?) 기록한 미국의 비밀문서를 필자가 찾아내어 199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제민일보>를 통해 유족들에게 드린 바 있다.
대전 형무소에는, '수형인 명부'(1999년 9월 추미애 의원 공개)에 의하면, 300명의 제주인들이 4.3관련 '정치범'으로 갇혀 있었다. 4.3때 육지형무소로 끌려간 제주인은 3000명이 넘는다.
지금 국방부 '군사편찬위'에서도 도처에서 행해졌던 '양민학살' 진상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극히 형식적이거나 요식행위를 하고 있음을 필자는 '군편위'의 회신에 의해 최근에 확인한 바 있다.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금수강산 도처에 유골들이 증언하고 산천초목이 증언하고, 해와 별과 달이 모두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이 없다. 그건 당연하지. 군경의 기록을 그대로 놔둘 수 없지. 그래서 사과도 인골수습도 못한다.
그 동안 <연좌제>로 유가족을 꽁꽁 묶어 탄압하던 것은 무슨 자료
근거를 가지고 해왔나 진정으로 묻고 싶다.
이제 '야만의 세월'을 종식해야 한다. '국민의 정부'라고 자처하는
현 정부는 '금수강산'도처에 산적해 있는 '인골'들을 수습하고 위령
하는 사업을 우선 해야 한다. 그리고 과거 '독재 정권'들의 만행을
대신 '사과'하는 '아량(?)'을 베풀어 유족들의 <50년의 한>을 이제
는 잠재워야 한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 예비검속에 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및 피학살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 위원장
제주도 백조일손 유족회 고문
현재,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리버사이드, UCR) 방문교수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 조사 연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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