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들

등록 2001.07.14 11:41수정 2001.07.1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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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경우를 당했던 일이 생각날 때가 있다. 불쾌한 일을 당하면 그것을 당하는 당시에도 한동안 언짢은 기분에 휩싸이지만 그런 기분을 만들게 한 사람은 후에도 얼굴만 보면 그 일이 생각나 기분을 별로 좋지 않게 만든다.


불쾌한 일을 만드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자신이 타인에게 불쾌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을 하지 못할 때가 대부분인 듯하다. 혹은 그래서는 안되는 일인지 알면서도 별로 대단치 않게 생각할 수도 있고,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막연히 혹은 당연히 그 정도의 실례는 이해해줄 것이라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불쾌한 일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정의를 그렇게 하고 보니 불쾌한 일을 만드는 사람들은 불쾌한 일을 만드는 일에 마치 중독성이 있는 듯이 생각된다. 하지만 그런 판단에도 일리가 있어서 보인다. 남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양보와 인내심이 필요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도 한다.

손해보고는 못산다는 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남보다는 자기 편의대로 생각하는 편이 훨씬 신경 쓸 일도 없고 편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자기 편한 대로의 삶에 한두 번 길들여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행동이 몸에 익어버리지 않겠는가 말이다.

잘 살기 위해서 힘들게 살아왔고, 학창 시절도 협동과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친구를 밟고 경쟁에서 이겨야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1등 지상주의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친구를 밟았듯이 동료를 밟으며 살고 동료를 밟고 아랫사람을 하인 다루듯 닥달을 하는 사람이 출세를 하는 일을 무한정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로지 경쟁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관념이 최고의 경쟁무대인 서울로 사람을 모이게 하고, 그 경쟁의 용광로 속에서 밀치고 아우성 치고 난리법석을 피워야 사는 맛을 느껴야 안식을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피 튀기는 치열함이 있기에 거기에서 도태되는 사람들이 겪는 상대적 박탈감은 그만큼 크기가 더하고, 비록 오늘 승자로서의 길을 걷는 사람도 능력과 체력의 한계를 느낄 때면 걷잡을 수 없는 스트레스에 의해 정신적인 면에서의 건강과 육체적인 면에서의 건강 모두에 심각한 타격을 입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전쟁 이후의 1960년에 비하면 지금 엄청나게 잘 살고 있으면서도 정신적 풍족감은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70년대나 80대만 못한 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살 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외국인의 눈에 너무 거칠고 무례하고 경우 없어 보이는 것은 여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자기 편한 생활 방식에 너무 도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앞서 사설이 이리 길었던 것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나를 불쾌하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글에서 불쾌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이 자기 생각에 너무 젖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점을 먼저 집어두고 싶어서였다.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박병진"이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처음 소개되니 그를 내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인가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은 전혀 아니다.

오늘 그의 얼굴을 보면서 이 글을 쓸 테마를 생각나게 한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지금 내가 하는 자기 얘기가 남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직장동료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직장 후배다. 우리나라 IMF의 도화선이 된 한보철강의 회장이 했던 식으로 무식하게 이야기하여 "내 아랫 것"이라는 이야기다. 울산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그는 총각으로 주말이면 자주 서울집을 오르고 내렸다. 집이 좋아서 그랬는지, 울산 촌구석을 일주일에 한 번은 벗어나고 싶었는지, 고속버스 타고 왔다갔다 하는게 재미 있어서 그랬는지, 서울에 뭔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자주 서울을 오르내렸다.

그의 집이 용산을 거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필요한 소프트웨어가 있을 경우에는 그에게 용산에 가서 사다줄 것을 부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울산이 아주 후진 동네였고, 택배 산업도 등장하기 전이어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전화를 해서 송금을 하고 등기로 물건을 받고는 했지만 그 일이 좀 성가신 일이라 작은 물건은 그가 서울 올라간다고 할 때 돈을 주며 사다줄 것을 부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두어번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물건을 건네줄 때마다 참으로 황당했다. 물건을 온전한 그대로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포장을 뜯고 내용물을 한 번 사용해본 흔적을 보인 상태로 물건을 건네받았다. 자기나 자기 동생도 PC를 좋아하니 남의 부탁을 받고 사다주는 것이지만 자기가 먼저 사용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소프트웨어 제품이 CD-ROM이 아닌 디스켓이었던 시절이다. 건내 받은 디스켓을 보면 프로텍팅도 하지 않은 상태다. 혹시 서울에서 사용해보면서 바이러스가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느꼈다. 당시는 인스톨 횟수가 제한이 되는 제품도 있어 나는 새 물건을 돈을 다주고 사면서도 인스톨 횟수를 손해보게 되는 셈이다.

멀리 서울에 가서 사다주는 성의가 고마워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내 돈 주고 산 물건을 남이 포장을 먼저 뜯어보고 사용해본 다음 중고 물건을 받는 기분은 참으로 언짢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사는 물건을 꼭 사용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나 같으면 포장을 뜯지 않은 채로 먼저 물건을 주인에게 건네준 다음, 빌려줄 것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는 "미안한 일이지만 포장을 뜯고 먼저 좀 사용해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고 사전에 양해를 구한 일도 없었다. 남의 돈으로 새 프로그램을 사면서 먼저 사용해보고 복사판도 불법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는 심부름 해주는 대가로 그 정도의 일은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일로 일방적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어번 부탁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여 심한 불쾌감을 느끼고 다시는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싫은 표정을 보이지 않았으니 내 속을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가 내 부탁을 힘겹게 생각하여 그런 부탁을 미연에 방지할 생각으로 일부러 그런 불쾌한 연극을 벌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참으로 경우없는 무례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일을 당하고나면 그런 사람에게는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없는 일이다.

천하에 경우없는 사람들은 담배 피는 사람들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게 담배 연기를 맞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우리나라는 길거리 어디에서나 서서든 걸어가면서든 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을 어디에서건 볼 수가 있다. 외국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고 벌금을 물어야 하는 일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여행하면서 부러워했던 일 중의 하나가 거리를 걸으면 담배 연기를 들이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단지에서도 담배 피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걸으면서 피는 사람도 있고, 통로 입구에 나와서 피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어떤 통로는 마치 굴뚝인 양 담배 냄새로 찌든 통로도 있다. 담배를 피고 싶다면 차라리 문 꼭꼭 닫아 놓고 자기 집에서 피는 것이 날지도 모르는 일인데 가족의 건강을 생각해서인지 가족으로부터 쫓겨나서인지 아파트 밖에 나와 피면서 다른 사람에게 연기를 들이키게 하는 것은 정말 얄미운 일이다. 담배 연기를 본의 아니게 들이키는 사람은 담배 연기를 뿜는 사람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고 싶을 정도로 혐오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이제 무척 많은데 여자들이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것은 남자에 비해 몇 배 더 심한 것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운전하는 사람들의 몰상식

이제는 야간에 신호대기 상태에서도 헤드램프를 끄지 않는 사람이 많이 줄었는데 아직도 야간 주행 시에 헤드램프를 끄는 것이 미덕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신호대기 중에 헤드램프를 껐다가 주행을 시작하면서 다시 켜는 것을 잊을 경우에는 심각한 사태를 유발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야간에 미등만을 켜고 운행을 하는 것은 헤드램프를 켜지 않고 주행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야간에 일어나는 교통사고의 대부분이 헤드램프를 오용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야간에는 정차 중이라도 헤드램프를 끄지 않는 것이 좋은 운전습관이고 안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해도 눈부심이 어쩌구 하며 이런저런 논리를 전개하며 토를 다는 친구들을 보면 좋을 것을 알려줘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야간 신호 대기 시에 헤드램프를 끄는 차를 단 한 대도 발견할 수가 없다. 그건 불법이고 어리석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운전기술이 미숙하고 머리가 나빠서 그렇게 운전을 하겠는가?

길에서는 사람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도로에서 차가 우선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에는 건널목이 없는 도로라도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면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운전을 한다. 인명을 경시하는 운전 습관은 자신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는 것 아니겠는가? 운전을 하면서는 인도를 걷는 사람이나 도로 위에 나와있는 사람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여유있는 마음으로 그들을 웃음으로 배려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설사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있더라도 길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안전할 때까지 차가 기다려주는 것이 올바른 운전 방법이다. 위협을 가하는 운전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도 항시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얼마 전에 지방도를 주행을 하면서 꿩이 새끼 여러 마리를 몰고 길을 건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꿩 행열이 길의 중간쯤에 왔을 때 반대 차선에서 덤프 트럭이 나타나며 "빵"하고 경적을 울렸다. 어미 꿩이 놀라 길을 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획'하고는 돌아서서 오던 길로 돌아가 숨어버렸다. 뒤따라 오던 조그만 새끼 꿩들도 어미를 따라 쪼르륵 다 숨어버렸다. 그런데 어미 꿩 바로 뒤에 일등으로 따르던 새끼 한 마리가 어미를 열심히 따르던 관성으로 가던 쪽으로 몇 걸음 더 갔고, 갑자기 사라진 어미 꿩을 찾으며 길 중앙에 서서 멈칫 거리고 있었다. 천연덕스럽게 길 한가운데 서서 기웃거리는 모습이 참 귀엽기도 하고 멍청하기도 하고 참으로 위험스런 상황이다.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녀석의 모습이 마치 "어? 다 어디갔지? 왜 가다 말고 돌아가지? 그냥 가는 게 맞는 거 아냐?"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쥐포처럼 납작해진 녀석의 처참한 몰골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덤프트럭이 그냥 지나갔다면 그 놈은 납작하게 먼지가 되었을 운명이다. 전국의 도로에서 운전자들의 무신경에 의해 수많은 짐승들이 매일 도로 위에서 비명횡사하고 있다. 그 덤프트럭 운전자는 차를 세우고 다시 한 번 "빵"하고 경적을 울려주었다. 그제서야 꿩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제 어미가 있는 쪽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며 사라졌다. 그 덤프트럭 운전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다. "도로 위의 살인자 그룹"이라는 오명을 쓰고 무법 운전을 일삼는 덤프트럭 운전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아파트 단지의 무법자 배달 오토바이

요즘은 아파트 설계가 차 없는 공간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즉, 주차장은 지하공간으로 만들어지고 아파트 지상 공간을 차없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길은 전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 그 길은 차가 올라갈 수 없으니 아이들이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이고 위험도 없다. 그런데 그 공간을 오토바이가 휘젖고 다니고 있다. 차가 올라갈 수 없는 그 길은 오토바이도 당연히 올라가서는 안되는 길이다. 방에서처럼 길에 편하게 퍼질러 앉아 있는 아이도 얼마든지 보이는 길이다. 그 길을 오토바이가 달리며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바퀴가 뭉개버리면 아이손은 순식간에 쥐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인식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니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경찰도 출동을 했다. 사연인즉 이렇다. 인도로 뛰어든 오토바이를 주민이 잡아 오토바이 키를 빼았아버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

아파트 내의 인도를 휘젖고 다니는 무법 오토바이가 있으면 아파트 경비가 그것을 가장 먼저 제지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이 그래야 하는 것임을 인지를 못하고 있으니 이야기가 안되는 일이다. 무법 오토바이의 키를 빼았은 사람은 뚱뚱한 외국인이다. 그는 한국인 부인과 결혼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가 그런 일을 계속하자 오토바이 부대에 소문이 나서 키를 빼앗길까봐 오토바이가 인도로 올라오지 않고 도로에 세우고 배달을 하는 일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아파트 내 인도에서의 안전성이 크게 확보가 되었다.

하지만 늦은 밤 그 외국인이 나타날 일이 없는 시간에는 그릇을 수거해가는 중국집 오토바이가 다시 인도로 올라온다. 하지만 한국사람은 그것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수위까지도.

우리나라 사람은 아직도 "내가 오토바이를 몬다고 해도 인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동업자 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라고 봐주는 것일까? 아니면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시비에 휘감겨 시끄러운 일을 자청해서 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한국인은 뒤죽박죽된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그런 일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국민성이 고착되어 버린 것일까? 한국인과는 달리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한국 땅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 외국인은 "내가 사는 환경은 내가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작심을 하고 자신이 고쳐갈 수 있는 것은 나서서 고쳐가는 적극성을 보이는 것일 것이다. 외국인의 그런 개척적이고 정의로운 도전 정신이 오늘날 서구 문명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일 것이다.

좋지 않은 일은 좋지 않은 일로 인식을 하고 고쳐나가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고쳐나가는 한편, 남을 배려하는 여유를 조금만이라도 가진다면 우리 주변에서 아름다운 이야기가 얼마든지 많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세상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세상이다. "정치하는 놈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든지 누군가 해줄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내 책임이나 역할은 없다고 생각한다면 좋은 세상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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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현대자동차 연구소 엔지니어로, 캐나다에서 GM 그랜드 마스터 테크니션으로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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