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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부인! 축하하오. 찻잔 세트를 받으시오."
아이들에게 '월례 의식'을 마치자마자 남편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서 자랑스럽고 의기양양한 어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아이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 '장거리 가족 소풍'을 오고 간 지 다섯 번째. 우리 가족의 지난 겨울 끝자락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서울 강변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4시간 남짓. 경북 풍산에서 시내버스를 갈아타고서 도착한 곳은 안동교도소. 면회 신청을 하고 잠시 기다리면 담당 교도관과 함께 교도소 정문을 통과할 수 있다. '변호사 접견실'이라는 명패가 달려 있는 방. 직사각형의 사무실 모양을 갖춘 그 방에는 교도관이 앉아 접견 기록을 하는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책상 앞쪽에 긴 소파가 있다.
그 방에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인 일지와 6살인 승지랑 매달 한 번씩 '가족 소풍'을 겸한 감격적(?)인 남편과의 상봉을 하고 있다. 왕복 8, 9시간이 걸리는 '가족 소풍'의 날이면 우리들은 아빠를, 남편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그 긴 시간을 견디며 기꺼이 즐거운 소풍길에 나서고 있다.
그런 소풍길 끝에 만난 남편과 우리 가족의 월례 상봉 첫 행사는 '들어올려 안고 뽀뽀하기'. 남편이 일지와 승지를 번갈아가며 들어 올려 안아주고 뽀뽀해주는 것이 현재 우리 가족의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스킨십이다.
'찻잔세트라니'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남편은 '한겨레21'을 펼쳐 보였다. 거기에는 '설 퀴즈 큰 잔치 당첨자 660명'의 명단과 당첨 선물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부인, 여기 당신의 이름이 보이시오?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었지요..."
장난기가 가득 배인 그의 목소리에는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 순수한 동심이 묻어 있었다. 남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뭔가 어눌한 듯한 인상을 주면서 가리킨 곳에는 '이경희 송파구 잠실 4동'이 인쇄되어 있었다.
매우 작은 글씨로 인쇄된 명단의 거의 끄트머리에 실린 내 이름과 우리집 주소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었으며, 별 모양의 표시도 진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가 이 소박한 기쁨을 금방 눈에 띄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이 전에 '퀴즈에 응모했다, 큰 상품은 기대하지 않지만 당첨될 것 같으니 행운을 기다려보자, 당신 이름으로 응모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새해(설날)를 맞아 그가 기원했던 여러 가지 희망과 소원이 있었을 터인데, 그 중에서 '퀴즈 당첨'이라는 희망이 행운으로 응답해준 모양이었다. 내가 받을 선물은 1등 상품인 자동차도 아니고, 2등의 컴퓨터도 아니었다. 거의 꼴등에 가까운 안양 LG축구단 제공의 주석 찻잔 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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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0주년에 주석을 받으면 행운이 있다고 한다. 이씨는 그 행운이 남편의 석방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 월간 <말> 박여선 |
"부인, 우리 어서 좋은 시간 가져야지요. 향기로운 차 구해놓고 기다리구려. 내 곧 갈 터이니 ."
선물 사진을 가리키며 계속 장난스레 양반투로 말하는 남편의 얼굴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맑은 웃음이 있었다. 더불어 '퀴즈 참가자들이 남긴 가슴 찡한 혹은 웃기는 뒷이야기들'이라는 꼭지에는 남편이 보낸 엽서도 채택되어 그의 글이 올라 있었다. '감방에 앉아 퀴즈를 풀며'라는 제목으로.
"'때늦은' 징역을 사는 양심수올시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연휴입니다. 이건 내리 3일간 갇혀 지내야 하니 죽을 맛이올시다. 운동도 접견도 (종교)집회도 제한되니, 그야말로 '곱징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빨간 날이 반가운 사회분들에게는 몹시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때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 되기도 하지요. 아무튼 시간 깨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김경환/경북 안동시)"
그날 나는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남편의 해맑은 모습을 떠올리며 절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고속버스에서 곤하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과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는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3주 후에 나는 남편이 감옥에서 만들어준 즐거운 추억거리인 주석 찻잔 세트를 받았다. 주석 찻잔 세트가 등기로 배달되어 포장을 뜯었을 때, 거기에 들어있는 것은 남편과 내가 예상했던 차를 마실 수 있는 용기가 아니었다. 진자주빛 박스 속에 진자주빛 비단같은 헝겊 위에 놓여있던 것은 맥주를 마시기 좋은 호프잔 용도의 주석 컵 2개였다.
찻잔이든 호프잔이든 나는 그 선물을 내게 만들어준 남편이 너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38살 먹은 남편이 기특하기도 하고 귀여운 생각이 들어 내 마음이 무척 흐뭇하기도 했다. 아니 나도 똑같은 동심으로 돌아가 '하늘만큼 땅만큼' 기쁘고 즐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놀라고 기뻤던 것은 제품 설명서였다.
'결혼 10년(석혼식)때 주석 제품을 소지하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 문구를 읽자마자 나는 한달음에 남편에게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올해가 우리의 결혼 10주년인데.
주석 찻잔 세트를 받아든 이후로 나는 우리의 결혼기념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남편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며. '주석'의 행운이 '4년 6개월'이라는 형량으로 못박힌 우리 가족의 헤어짐을 단 하루라도, 단 한 시간이라도 단축해주기를 바라면서. 다섯 밤 자면 아빠가 온다고, 이번에는 진짜로 열 밤만 자면 아빠가 온다고 꽤 오래 동안 해왔던 헛약속들이 이제는 지켜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지난 6월 15일은 남북 정상회담 1주년이었다. 하지만 남편과 나에게는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다. 여전히 남편은 감옥에 있다. 나는 아직도 주석잔의 행운을 믿고 있다. 우리의 '결혼 10년'은 아직도 5개월여가 남아있다.
나는 믿는다. 결코 즐거울 수 없으며, 생경한 아픔과 서러운 안타까움이 배어져 있는 '장거리 가족 소풍'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양심수'라는 이름을 가슴에 품고서 푸른 수의를 입고 검붉은 듯한 갈색 수번 3000을 달고 있는 남편을 그만 만날 날이 곧 올 것이라고. 푸른 수의가 만들어준 내 마음의 푸른 멍이 이제는 가실 날이 왔다고.
덧붙이는 글 | <김경환 심재춘 석방을 위한 모임>
김경환 심재춘 씨 사면을 위해 사랑과 관심을 주십시오. 마음을 보태주실 분은 인권실천시민연대 홈페이지(www.hrights.or.kr)에 마련된 서명란에 서명을 해 주십시오.
김경환 심재춘 씨 석방을 위한 서명용지를 보냈더니 어떤 분이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핏볼테리아라는 아메리카대륙 태생의 개를 좋아하는데, 이 개는 싸움에서 지는 경우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으며, 최소한 비긴다고 하더라."
이번 일에서 비기는 일은 사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희 이문희 두 사람의 가정을 평상시처럼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일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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