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질서인가 무질서인가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 <나는 무질서한 것이 좋다>

등록 2001.07.23 17:00수정 2001.07.2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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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와 카오스'나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와 같은 이항대립적 분류를 한다면 '무질서와 질서'라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아내가 질서라면 애인은 무질서, 넥타이 맨 회사원이 질서라면 머리 헝클어진 예술가는 무질서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이 사실상 가능할까. 딱 부러진 경계선은 어디일까. 이는 철학과 사색의 범주 안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서로 반대되는 것 사이에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다. 질서는 무질서를 반영하고 무질서는 질서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사>(리브로)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철학이야기꾼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가 쓴 이 책 <나는 무질서한 것이 좋다>(한길사)는 바로 이런 질서와 무질서의 상호관련성에 대해 말한다.

질서와 무질서의 창조적 어울림

그래서인지 글쓴이 크레센초는 책제목에서 '무질서한 것이 좋다'고 해놓고 이 책을 쓰기 위해 "작은 단계를 설정하거나 적어도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작은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며 은근슬쩍 질서 속에 편입해 버린다.

사실 그것이 마음에 찔렸는지 그는 "무질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도 최소한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면서 비판의 예봉을 피하는 노련함에서 타고난 이야기꾼다운 기질을 통쾌하게 발휘한다.

크레센초는 나폴리의 수학자 카초폴리 교수, 좌익과 우익, 파르메니테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축구 선수 리베라와 마라도나, 니체와 컴퓨터 등 다양하고 서로 다른 주제들을 질서와 무질서라는 열쇠말을 통해 직조해 나가면서 질서와 무질서의 창조적 어울림이 던져주는 삶의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전설적인 도박꾼 포포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됐다며 한턱 내기 위해 친구들을 점심식사에 초대한다. 여기서 포포는 "행복을 살 수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기다림을 보상할 수 있는 예기치 못한 것, 미친 짓, 무질서 등 이런 것뿐입니다"고 의미심장한 말로 일장 연설을 한 후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의 행방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프로 도박꾼답게 그는 돈으로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골려먹는 그의 비아냥거리는 솜씨가 밉지만은 않다.
그는 질서와 무질서, 어느 쪽이 더 생산적일까며 자신의 첫 책 <벨라비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출간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통일의 진짜 주모자였던 카부르 백작보다 가리발디 장군을 항상 더 좋아하는 것은 그가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붉은 셔츠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크레센초가 자신의 첫 책 출간을 위해 IBM을 그만두고 동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려하자 동료들은 판매회의에 참가해야 한다는 이유로 총총히 발길을 돌리더라는 것.

내안의 질서와 무질서 지도

졸지에 질서로부터 일격을 당한 그는 그래서 자신을 무질서하게 하기 위해 걸어서 출판사로 가면서 머리까지 헝클어 한껏 무질서의 대명사인 예술인의 행색으로 갔는데, 아뿔사 그곳에서도 넥타이를 맨 사람들과 판매회의를 해야했다. 방의 맨끝 벽에 걸려있는 자석칠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단다.

"데 크레센초 - 벨라비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 232쪽 - 4천 리라 - 단기, 중기, 장기적인 관측"

소크라테스는 모든 철학자들 가운데 무질서의 옹호자를 헤라클레이토스로, 플라톤은 의무의 옹호자이자 질서의 지지지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정작 소크라테스 자신은? 스스로를 말의 뱃가죽에 들러붙어서 기식하며 말들을 잠 못자게 하는 등에에 비유하며 하는 말이 압권이다.

"등에란 벌레가 아주 독하게 한번 찌르면 국가란 말은 깨어나지. 습관에 대립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나면 등에의 개입은 분명 무질서에 속해 있네."
그러면서도 그는 질서와 무질서의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크레센초는 역사상 이름이 알려진 위인들의 이름을 백여개나 나열해 놓고 당신에게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질서는 검은색, 무질서는 빨간색으로 체크해 분류하는 게임이다.

주세페 가리발디/엔리코 게치/베페 그릴로/나폴레옹/잔나 난니니/네로 황제/네스토레….

자, 당신의 분류에서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각각 체크된 사람은 누구인가. 과연 내 안의 질서와 무질서가 어떻게 들어있는지를 알아봄은 물론이거니와 이 책을 쓴 크레센초는 어떤 분류가 이루어졌는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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