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글은 단 한번 쓰고 그칠 내용이었습니다만, 여러분이 올리신 댓글을 보고 부족한 생각을 더하여 추가하여 올립니다. - 기자주)
이 부족한 글을 읽으시기 전에 무릇 한가지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혼란의 시대입니다. 부족한 저의 기사 조차도 믿지 마시고, 오로지 여러분의 마음을 믿으십니다. 혼란의 시대에는 이 사람은 이 말을 하고, 저 사람은 저말을 하며, 여러분의 총기를 해치고, 뒤로는 자신의 이익을 챙깁니다. 입으로는 여러분을 위한다고 하면서, 몸으론 여러분을 배신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말하면서 개인의 치부에 얼마나 성바른지요. 얼마나 이런 짓 자주 보셨는지요.
하여, 부탁드립니다. 제 글을 믿어달라고 여러분께 강박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스스로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보십시오. 제 기사의 목적은 주장하려 함이 아니라, 여러분을 생각하게 하려 함입니다.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는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카이사르도 말했듯이, “사람은 스스로 보려고 하는 것만 보려는 법”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에게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압니다. 만약 제 편벽한 기사가 여러분의 마음을 미미하게 울리는 바가 있다면, 그 힘은 저에게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미 그런 울림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공명한 것뿐입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하는 힘은 이미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1. 포장지는 쓰레기통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나이는 채 9살에 불과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정희 씨, 전두환 씨, 노태우 씨의 통치시기를 저는 민주주의의 이름을 건 독재의 시대라고 믿습니다. 심지어 6.29선언으로 대권을 쥔 노태우 씨의 통치기에도 이것은 변함이 없었다고요. 왜냐하면, 시민이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시민의 민주주의, 즉 시민이 국가와 체제의 중심으로 스스로 서겠다는 의지를 가진 것은 그나마 좋게 봐줘서 김영삼 씨가 집권할 무렵부터겠지요. 지금 조선일보니, 이문열 씨 같은 부류는 시민을 홍위병이라는 둥, 중우정치(衆愚政治)라는 둥 입방정을 떨지만, 그런 그들도 정치에 시민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시민의식이 없다는 둥 또 헛소리를 할 것입니다.
그래요. 대한민국의 시민 민주주의는 겨우 9살, 채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과오에는 그토록 관대한 조선일보와 그에 빌붙는 논객의 혀는 어찌 가혹한지요.
- 지식인들의 입을 막는 치졸한 사이버 테러다.
- 홍위병이다.
- 시민단체는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니, 그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하수인이다.
묻노니, 조선일보와 그 권세에 기대어 치부하는 논객들이여. 9살짜리 어린아이가 소뼈를 씹을 수 있습디까? 그대들처럼 지식과 교양으로 머리가 꽉 차버린 자들의 눈에는 이제 성장하기 시작하는 시민과 시민단체가 그토록 강력하고 위험해 보입디까? 배웠다는 자들의 참으로 대단한 관용심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데, 그대들은 예절을 따집니다. 물론, 예절, 품위, 적당한 관례, 사회적 관습 등등 중요하지요. 그러나 지금은 쓸데없는 포장지는 쓰레기통에 버릴 때 입니다. (세금) 도둑이 눈앞에서 달아나려하는데, 상투 틀고, 의관을 정제하고, 예의를 차려서 “게 섯거라!” 해보십쇼. 집에서 기르는 얼리친 개나 놀라 우뚝 설 겁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문법이 있습니다. 거칠고, 투박하고, 반형식적이라, 소위 지식인의 눈에는 수준 낮아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최소한 심장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산 사람이 피가 통하지 않는 차디찬 송장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예의입니다.
당신들은 할말이 없을 때, 연배와 예절과 품위를 따집니다. 안 그런가요?
어리석습니다! 만약, 당신들이 진실이라면, 예절이나, 품위를 따지지 않아도, 우리는 당신들을 믿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들이 진실이 아니라면, 아무리 교양과, 지식을 내세워도 우리는 당신들을 신뢰하지 않을 겁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려 들지 마십시오! 그리고 시민의 말이 거칠다고, 잘난척 교만 떨지 마십시오! 우리 눈은 장식품이라서, 이 눈엔 그 위악스런 장난질 안 보일 줄 압니까?
홍위병이 뭡니까? 홍위병이! 옛말에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엔 부처만 보인다고 합디다. 홍위병 눈에나 다른 세상 사람들이 다 홍위병으로 보이는 것이지요!
2. 욕망에 충실합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정말 민주주의를 모릅니다. 민주주의를 배운바도 없고,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맞는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전통도 없습니다. 4.19세대, 386세대, 279세대가 서로 갈가리 찢어져서 선배가 후배에게 물려주어야 할 의식의 갈무리마저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무엇이 “시민의 민주주의“ 인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수 있으나, 저는 타자와 관계에서 개인의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는 것인가를 스스로 아는 것이 ”시민의 민주주의“ 라고 믿습니다. 독재나 억압적인 봉건사회에서는 개인을 인위적으로 틀안에 집어놓고 그 범위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욕구의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일일이 한계를 긋습니다. 이에 반해서 민주주의는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의 욕구에 따라 마음대로 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단! 여기엔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동등한 타자의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 만약 그것이 안되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작게 개인화된 독재주의라고 할만합니다.
당연하지요! 나의 욕구 실현이 정당하다면, 타자의 욕구 실현도 지극히 정당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간단한 이해를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이 난세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 깊은데 있는 욕망을 꺼내어 햇볕아래 비추지도 보지도 못하고 음울하게 스스로 썩어갑니다.
즉, 우리는 모릅니다.
한스럽지만, 어디까지 해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발휘할 수 있는지 그 정확한 범위를 모릅니다. 우리 사회의 핵심 구성원인 “시민” 가장 중요한 그런 것을 배워야 할 청소년기엔, 독재자의 압박에 짖눌렸고, 홀연히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이미 머리가 굵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뒤를 이어 자라나는 소중한 아이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서 물려줄 경험이 없습니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법, 돈 버는 법, 경쟁에서 이기는 법 따위를 가르치지 말고, 이것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운 바도, 없고 느낀 바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깨닫기 위해선 어찌해야 하는지요. 누군가 가르쳐준 적이 없다면! 몸으로 스스로 부딪쳐 치열하게, 부서지고, 깨어지며, 피흘리며 알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법으로 이 모든 관계를 정해둔다면, 그 사회는 법으로 망하고 말 겁니다!
이것이 9살짜리 시민 민주주의의 정체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 이런 면을 왜 눈뜨려 하지 않습니까! 지금 수준에선 오로지 “욕망”에만 눈뜨는 것은 당연합니다. 과거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욕망한다는 것 자체가 금지되던 시간을 벗어난 얼마나 되었다고요. 요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그야말로 관능의 시대가 아닙니까! 하리수나 정양 같은 “몸”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금지의 억압은 아직도 서서히 풀리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수준을 비아냥대고 욕하는 멍청하고 미련한 자들이 어찌 이리 많은지요. 우리 사회의 님비(NIMBY - NOT IN MY BACK-YARD)성향이나, 지역 이기주의를 한탄하는 지식인과 신문과 논객은 많습니다. 선진국에 비하면.. 한국은 아직도 어쩌구, 저쩌구입니다.
어리석습니다. 조선과 그를 옹호하는 논객이여! 민주주의의 성숙도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갈등과 혼란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금 해야만 하는 갈등입니다! 지금 치뤄야만 하는 산고이며 아픔입니다! 완전히 탈피한 나비가 번데기를 벗고 나올 때 핀셋으로 번데기를 찢어주면, 오히려 나비에게 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비는 번데기를 찢고 나올 때, 그 힘든 고통속에서 날개를 튼튼히 하고 말릴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갈등을 통해서, 우리 사회 주체들은 서로의 한계와 욕구에 대한 이해도를 스스로 파악하고 상대방에 대한 범위를 조절하게 되고, 스스로의 욕망의 범위와 힘을 알게 됩니다. 또 갈등을 피하자면 얼마만큼의 범위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갈등과 싸움을 피하지 마십시오! 이 과정을 넘어야,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3. 조선일보의 욕망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당연히 저는 조선일보의 욕망을 인정합니다. 저와 공유할 수는 없지만, 조선일보의 보수적 가치관도 어떤 면에선 나라에 필요할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또한 언론 이전에 언론기업으로써 조선일보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이를 먼저 배신했습니다. 우리는 조선일보가 스스로의 욕망과 신념에 맞추어 행동할 권리가 있음을 믿고 존중해주었는데, 조선일보는 그런 우리의 신뢰를 배신했습니다! 시민과 그들의 모임은 조선일보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조선일보는 잘못 부과되었다고 생각하는 세금에 대해 저항할 권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1원의 세금이라도 감추고 숨긴 것을 관행이라고 변명할 권리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실수에 의한 1원이라도, 잘못된 세무 관행으로 1원이라도 누락했다면, 조선일보는 시민을 홍위병이라 모욕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권을 비난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객관적 진실에 의해 조선일보를 빨갱이 신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거 좌익기자들이 득실거렸던 신문사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가 근무했던 바로 그 좌익 신문이 어디입니까?
언론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이 더러우면, 무엇으로 이 시대를 비춘단 말입니까! 조선일보가 참으로 탄압받을 언론의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혀를 깨물어 죽는 것으로 수치심을 보여야합니다. 더러운 거울로 우리를 비출 수는 없습니다. 거울의 주인인 시민이 힘들여서 닦아내던가, 아니면 깨뜨려 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홍위병이라니.. 오만합니다! 아아 가여운 조선일보여. 시민의 분노가 그토록 공포스럽게 느껴진다면, 왜 이토록 순진하고, 순수한 시민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상처를 주었습니까? 조선일보에 대한 증오심이 이토록 깊은 것은 그만큼 과거에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대가 큰데, 어찌 실망이 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당신들의 검은 죄가 땅을 덮고, 당신들의 추악한 교만이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음험한 조선일보여! 언제까지 이 모든 일을 “좌익의 음모”라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조선일보의 기자여, 그대들은 정말 이다지도 세상 물정을 모릅니까?
정권에 사과하지 마십시오. 왜 정권과 화해하려고 안달복달입니까? 국민에게 사과하십시오. 한낱 5년짜리에 불과한 정권이 이 엄청난 일을 기획하고 꾸미고 운영하고, 시민단체를 조정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대들은 동정할 가치도 없이 불쌍한 바보들입니다.
정권이 시민의 하수인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시민이 정권의 배후조정세력입니다. 어찌 이 간단한 사실을 무시하려고 그토록 애씁니까? 더 설명해야 알겠습니까? 다음번에 행여 그대들이 지원하는 후보가 집권하면, 그땐 조선일보가 꽃놀이패를 쥘 거라고 생각합니까? 어리석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조선일보가 밀고 있다고 의심받고 있는 대선후보 L모씨는 과거에 사정기관의 장으로 언론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수구 언론의 반발에 밀려서 낙마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힘을 약하게 할 언론을 오냐오냐 할 듯 싶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안됩니다. L모씨는 자기 편이 아닌 사람은 참을 수 있어도, 한번이라도 모욕했던 사람은 끝까지 보복하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지난번 선거 때 그를 도왔던 이들 중 지금 남아있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그렇게 밀려난 이들은 대개 한탄하더이다. 그가 과거에 낙마했을 때, 한번이라도 면박준 것을, 그는 죄다 기억하고 있더라고. 예언하지만, 그가 대권을 쥐면, 정권은 지금보다 더 교묘하게 조선일보를 옥쥐일 겁니다. 불쌍합니다. 조선일보여. 그대를 도울 수 있는, 또한 도울 힘이 있는 진정으로 강한 시민의 힘을 내동댕이치고, 왜 자꾸 호랑이 입으로 걸어들어갑니까?
이번 일로, 시민의 민주주의는 그 나이를 훨씬 더 먹고, 더 튼튼하고, 더 강건해질 겁니다. 시민은 흙이고, 신문은 그 흙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흙이 변했는데, 그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무슨 수로 견딥니까?
분명하게 말합니다.
김대중 행정부도, 조선일보도, 한나라당도, 모두 우리가 이 세상을 잘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이며, 거울이며,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한낱 우리의 시다바리입니다.
시민이 강한 권력에 마구 휘둘리는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했습니다.
이제 조선일보가 기댈 것은 오로지 시민뿐입니다. 시민에게 우선 사과하십시오.
분명한 진실이 눈에 안들어옵니까? 거울의 두꺼운 때를 벗겨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강한 세제를 쓰듯이, 시민은 조선일보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이 정권에 힘을 몰아 줄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 세제마저도 가뿐한 마음으로 깨끗한 물로 씻어버릴 겁니다.
여기에 사회주의니, 홍위병이니 소위 그대들, 유식한 자의 말장난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면 더러움을 씻어내고자 하는 오로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안될 듯 싶은가요? 물론 당하는 당사자들은 괴롭겠지만, 시민은 정말 손해보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피해가 있겠습니까? 더러움으로 더러움을 벗겨내면, 어찌나 시원하고 상쾌한지요. 그렇게 해서 거울이 반짝반짝하면, 불쑥 자라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또 어찌나 유쾌할지요.
경고합니다. 우리의 애정을 실험하지 마십시오.
더러운 거울을 닦아내는 인내심에도 이처럼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잊지 마십시오.
거울이 더러우면, 그 주인이 힘들여서 닦던가, 아니면 깨뜨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권리입니다.
이 당연한 주인의 권리를 거부한다면, 조선일보의 기자와 논객들은 시민의 것이 아닌, 일개 사주 개인의 노예이며, 하인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그렇다고 한다면, 대한민국 사람이 남의 나라 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듯이, 남의 물건이 어찌되든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그런 심뽀라면, 너무 강한 세제 때문에 거울이 부식되고 녹아내려도 살려달라 우리한테 하소연 하지 마시고, 조용히 죽어 사라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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