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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신현준이 지적한 대로,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큰 적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이다. 밤에도, 방학에도 이어지는 유치찬란한 제도... 거기에 충실히 따라온 나는 중고교 6년동안 많은 기회를 박탈당했었다. 묶인 나는 이어폰을 통해 락의 세계와 접속했고, 야간 자율학습 새로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밤하늘을 보다 달아오른 공연장으로 마음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한결 몸을 움직이고 옮기기가 쉬운 대학생이다. 내한공연이니 락 페스티벌이니 하는 것들을 흘려 들어야만 했던 과거와는 작별했다.
부산 국제 락페스티벌에 가자는 이야기는 처음에 내가 고교 동창들과 함께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나왔다. 친구 녀석이 보도 자료를 올려놨고 그것을 살펴본 카페 주인인 나는 광안리에 가 있을 기간을 10일부터 13일로 제안했다. 페스티벌은 11일부터 14일까지 열렸지만 10일의 전야제에 세미나가 있고, 14일에는 별로 관심없는 아마추어 그룹들의 경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엔 바로 '락페스티벌 준비위'를 발족했다.
시험이 다가와야 공부를 하고 마감이 가까워야 부랴 작업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 맘 푹 놓고 있던 우리는 공연을 모레쯤으로 앞두고서야 준비물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텐트는 내 몫이었고 이를 빌미로 나머지 자질구레한 것들을 친구들에게 떠맡겼다. 실망스럽게도 동행할 친구는 둘뿐이었다.
10일 오전 11시 32분. 구미역에 셋은 결집했다. 한 친구가 그 친구의 친구 세명이 동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또 그중 하나와 숙식을 같이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텐트가 넷이 자기에는 불편한 크기였다. 큰 어려움이야 있겠느냐만, 갑자기 알려주니 약간은 불만스러울 수밖에. 내 성질을 아는지라 친구도 일방 통보를 하면서도 조심스러워했다. 어찌하랴. 손님을 박대해서는 안된다. 역은 피서를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로 찼다.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만은 옷차림이 짐작을 쉽게 만들었다.
구미에서 부산까지는 2시간이 소요되었다. 2시간을 법대 다니는 친구와 앉아 재미도 없는 담화로 소비했다. 최근 위헌 판결이 터져나오는 통에 애로 사항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나는 C일보의 욕을 해댔다. 2년 전이었다면 락그룹이 입에 오르락 내리락 했을 건데.
뒷자리에 앉은 또다른 친구의 주관심사는 여전히 락이었지만 그와도 역시 나눌 것이 별로 없었다. 70년대 하드락에 향수를 갖고 있으며, 80년대 헤비메탈에 공감하고 90년대 초의 얼터너티브 사운드에 동조하는 나. 그에 반해 그 친구는 철저히 최근의 트렌드만 선호했다. 나는 최근 하드코어나 익스트림 계열의 뮤지션들의 이름이 익숙치 못하고 그는 락의 고전과 명인들에 대한 이해가 희박하다.
서울역이 기차역과 지하철역을 겸하고 있음과 다를 바 없이, 부산역 근처에도 지하철역이 있었다. 부산에서 사는 선배에게 전화를 거니 서면역에서 내려 갈아타 광안역으로 가라고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광안역은 미개통 상태였다. 개표소의 직원은 이전의 역에서 내리라고 안내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걸어가 만난 광안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해수욕장은 예측보다 작았다. 해변 끝에는 페스티벌의 무대가 들어서 있었다. 2001 BUSAN ROCK FESTIVAL. 외국의 여느 저명한 콘서트를 연상시키는 무대에서는 누군가가 스네어 드럼을 치면서 사운드 체킹을 하고 있었다. 해변을 울리는 북소리를 따라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 난관인가. 광안리 해변에는 텐트를 칠 수 없음을 몰랐던 것이다. 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잠시 쉬다가 일행은 모텔을 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동생과 함께 서울에 잠깐 다녀올 때 신촌의 모텔은 2만 8천원이었지만 아니나다를까, 한창 피서철인 해안의 모텔은 하루밤 5만원이었다. 주인 아저씨의 말씀에 따르면 이튿날은 휴일이라서 7만원이 될 예정이라나. 어쨋든 다른 방법이 없어서 방에 짐을 풀어놓았다.
8월 중순에 다다른 바닷물은 만만찮게 차가웠다. '1등급' 판정을 받았다는 플래카드 문구와는 달리 수질은 그리 깨끗치 못했지만 수영, 바나나 보트, 노 젓기를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다. 야외 공연장에는 아직도 설치가 한창이었다. 내일이 공연인데...... 꺼림직하기도 했다.
스피커는 거대한 볼륨으로 노래를 뿜어냈고 구경하던 차에 좌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중 몇몇은 짜증을 내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와서 전야제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를 보다가 세미나장으로 향했다. 공연장 인근 파로스 오피스텔 6층에서 열린 세미나에는 임진모, 박준흠, 고기모 씨가 참석했다. 세미나장에는 팝 칼럼니스트 성우진 씨, 그룹 NEXT와 GEENIE 출신의 이동규 씨의 모습도 보였다.
입구에서 나눠주는 컨텐츠를 받아들고 의자에 앉았다. 전혀 넓지 않은 장소였지만 객석의 군데군데가 비어 있었다. 이윽고 임진모 씨가 '한국 락 페스티벌의 발전방향'이란 주제로 발표를 시작했다. "80년대 한국락이 소방차, 박남정, 김완선을 위시한 댄스 가수들의 등장과, 화면을 가득 메우며 춤추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방송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중문화에는 음악은 없다. 방송의 하위로서 음악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다.
임진모 씨는 미국, 영국, 일본의 뮤지션들이 수익의 60%이상을 공연으로 버는 데, 한국의 상황은 음반 수익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실을 거론하기도 했다. "공연음악의 성격을 갖는 락이 한국 대중음악의 대안이다"가 요지였다.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이라는 책으로 알려진 박준흠 씨는 '한국 락음악(산업)의 현황, 문제점 및 대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나왔다. 락음악계 내외부의 문제점부터 락음반의 제작과 유통,공연장, 매체, 정책까지 꼼꼼이 살폈다.('조중동'이야기까지 나왔다. 어디서나 걸림돌이다.) 박준흠 씨가 너무 많은 짐을 지지는 않았나 싶었는데, 발표 뒤에 사회자 조경서 씨가 한시간이나 지났음을 알리자 박준흠 씨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아마도 그는 발표에 빨려 들어갔던 것으로 보였다.
고기모 씨는 '대안으로서의 국내 락 음악의 문제점'을 논했는데 주로 국내 인디 음악의 사례가 다루어졌다. 열악한 한국락의 현실과 저수준의 대중들 때문에 세 패널들의 세미나는 성토의 성격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는데 관객석의 질문도 만만치 않았다.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연제협 사태를 비롯해 대중음악 전반에 관한 의견을 물어봤을 때만해도 장내는 평온(?)했다.
그렇지만 대중문화계에 종사하는 몇몇이 이 세미나 자체에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며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특히 막바지에 이르러 패널들은 "주최측에서 결정한 건데, 왜 우리에게 따지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문제 제기들 자체는 타당하지만 자리에 걸맞지 않는 것 같았다.
세미나가 끝나고 나오는데, 내년 월드컵을 기해 벌어질 락 페스티벌을 기획하실 분께서 "락 매니아십니까?"하고 물어오자 수줍게 수긍했다. 건물을 나서면서 그는 다시 한번 내게 외친다. "락 매니아 화이팅!" 숙소로 향하면서 "진짜 락 매니아는 약 5000명 가량 뿐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임진모 씨의 단정을 떠올렸다. 숫자는 불확실하지만 진정한 매니아가 드문 것은 현실이긴 하다. 매니아의 여부를 이모저모 따져볼 때 꼭 상정되는 것이 '소장하는 음반의 갯수'인데 그 대목에 이르면 나도 할 말이 없다. 겨우 세자리를 채울까 말까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꾸준히 애정을 놓지 않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음반의 갯수로 마음까지 측정하지는 못할테니까.
숙소로 돌아와 술과 안주를 벌려 놓았다. 나와 친구 둘, 그리고 친구의 친구까지 모두 넷이었다. '친구의 친구'와는 처음에는 서먹했지만 통성명을 하고 조금 친근하게 되었다. 대화는 즐거운 편이었으나 어째 대학 친구들과의 잡담보다 활기가 떨어져서 아쉬웠다. 맥주와 레몬소주를 비우고 소주의 첫잔을 마시는 찰나, 한 친구가 괴로워 얼굴을 찡그린다. 짜식, '술 시합'을 뜨자더니 영 안 되겠군.
날이 밝고,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려 모텔을 나섰다. 텐트촌이 있는 송정리 해수욕장으로 가자는 주장이 있었다. 우리는 오가기에 가까운지 먼지도 모르는데, 거기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가도 되겠는지... 그런 걱정이 있었지만 송정리와 광안리가 가깝다는 말에 혹하여 이동하기로 했다.
교통편을 모색하며 우왕좌왕하다 어렵게 버스에 올랐다. 송정리는 멀었다.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지만 광안리보다 훨씬 피서지다운 송정 해수욕장을 보며 마음을 풀었다. 바람에 한번 날려가 버리는 사태를 극복하고 텐트를 완성한 순간, 주머니가 허전함을 느꼈다. 지갑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지나왔던 모래밭을 아무리 뒤져봐도 찾을 수 없었다. 되새겨본 기억에서는 버스안에서 마지막으로 본 지갑만이 떠오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름파출소에 분실신고를 했다.
바람은 거세었다. 짐을 놓지 않는 한 금방이라도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짐을 놔두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방안에 들어있는 귀중품도 그랬고, '친구의 친구'의 가방엔 객지에서 입었던 옷들이 죄다 들어있었다. 고뇌에 찬 결정. 텐트를 거두고 송정리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건너 뛴 탓에 신경은 예민해졌고 지갑까지 잃어버려 가면서 힘들게 도착한 마당이라서 짜증은 극대화되었다. 기존의 일정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 단 일푼도 없는 처지가 되어서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되돌아온 광안리의 식당에서 라면을 시켜 먹었다. 되도록 친구에게 빚질 액수를 줄이고 싶었다. 짐을 맡길 데를 찾지 못하여 모두들 심각해하던 중이었다. 분위기도 냉랭해졌고 어깨와 다리는 근육통에 절어 있었다.
- 2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관련 글 : <광안리가 생각한 우드스탁>, 김수민 (http://column.daum.net/imaciti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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