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과 미사일방어체제(MD) 추진,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력 약화, 북한의 남북대화 재개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 등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차질을 빚고 있는 가운데, 8월 평양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한 남측 대표단 일부의 돌출 행동과 보수언론 및 야당이 이를 정치 쟁점화함으로써 남남갈등이 본격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는 이 때일수록,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하나하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반도 냉전구조,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전문가들을 만나 문제해결을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취지로 진행하고 있는 릴레이 인터뷰 두 번째 순서로 국방연구원에서 북한군사연구팀장을 맡고 있는 서주석 박사를 만났다.
국방부 산하 정책연구기관에서 주요 직책을 맡는 입장이지만 서 박사는 주요 현안 및 문제해결 방식에 대해 조심스러우면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평화네트워크 연구 소모임인 평화문제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한 이 자리에서 서 박사는 신중한 어투로 남북관계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한미관계의 전향적 개선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북한의 위협을 감소시키고 실질적인 군축을 위해서는 북한의 변화도 필요하지만, 북한의 심각한 경제난과 안보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남한 및 미국의 노력도 필요하다며 '역지사지(易地思之)'를 강조했다.
다음은 서주석 박사와 주고받은 대화 가운데 주요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인터뷰 내용 전문은 평화네트워크 홈페이지(www.peacekorea.org)에서 볼 수 있다.
- 먼저 남북, 북·미, 북·일, 한·미관계 등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국가간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한측 요인을 중심으로 설명해주십시오.
"흔히 미국 부시정부 출범 이후의 강경한 대북정책이 거론됩니다만, 사실 작년 12월의 제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부터 불안한 흐름이 있었지요. 특히 북한이 절실하게 요구했고 작년 남북정상회담에서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진 전력지원 문제에 있어서 국내의 여론 부담 등으로 인해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 결과 김대중 대통령이 '베를린선언'을 통해 정책적으로 선언하고 북한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 부분에 대한 지원이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요. 이는 무엇보다 국내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따른 '평화비용' 확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하겠습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재검토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됐다고 보십니까?
"먼저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검토결과에 대한 평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최근 남북 및 북미관계가 모두 경색 국면에 있는 데 대해 많은 논자들이 미국의 강경 정책을 지적하고 있고 검토결과 발표 이후에 아직까지 북미대화가 재개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면밀히 따져 보면 대북정책 재검토 결과 그동안 많이 얘기됐던 제네바합의 파기라든가 화전 대체 등 보다 극단적 대안들이 배제되고 일단 대화가 선택되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부시 정부의 고위 정책담당자들이 출범 초기에는 강경한 발언들을 많이 했지만, 재검토 과정을 통해 그같은 내용들이 조정되고 현실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같은 평가에 비추어 볼 때 현재 나와 있는 세 가지 의제가 대북 협상의 목표라고 단정짓기보다 앞으로 협상 국면에 들어가면 조정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 검토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입장이 얼마나 반영됐는가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물론 1998∼99년의 페리 보고서 준비과정에 비해 우리의 입장이 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지난 3월의 한미정상회담이나 그 뒤 5월의 호놀룰루 한미일 정책조정그룹회의 등을 통해 사전 조율이 있었지요. 대북정책 검토 결과가 나름대로 현실화되는 방향으로 간 데에는 이같은 우리 정부의 노력도 있었습니다만, 그보다 부시 정부의 MD 강행에 대한 국제적 반발,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상원의 여야구도 변화, 대북 강경책에 대한 민주당 및 일부 언론의 비판 등 미국 국내정치 요인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됩니다."
- 한반도 평화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구조적 한계 때문일 수 있는데요. 남한은 굳건한 한미동맹체제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해결주의를 강조하고 있고, 미국은 평화문제에 있어서 자신이 배제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고, 북한은 평화문제는 남한이 아닌 미국을 협상 대상으로 보고 있는 불일치가 평화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게 바람직할까요?
"우리 정부가 외교안보정책 목표의 하나로 한반도 평화체제 기반 구축을 내세웠습니다. 작년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안보·군사문제에서도 동시에 진전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를 받아들여 경의선 복원작업과 남북국방장관회담을 추진하면서 더욱 부각된 문제이지요. 그런데, 막상 미국에서는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을 공식적으로는 신뢰하고 지지하고 있으면서도 혹시 평화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너무 앞서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지요. 또 북한도 평화·군사문제의 당사자가 미국이라는 종래의 입장을 새삼 강조하면서 우리의 평화체제 관련 정책이 상당한 한계에 부딪힌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견해입니다만, 어차피 남북한과 미국의 3자 구도로 되어 있는 평화·군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략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남북한 당사자주의만을 강조한 '반향없고' 성과없는 정책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저는 한반도 평화문제에 물꼬를 트는 과정에서 남북한 및 미국이 참여하는 3자 접근 방식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당장 3자 회담을 갖자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대화 구도, 즉 남북 및 북미대화, 그리고 한미공조라는 복합적 쌍무체제를 유지하더라도 평화 문제에 대한 3자 모두의 관심과 이해를 고려하는 가운데 문제에 접근해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평화문제의 해결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되고 평화정착 과정에서 미국의 입장이 반영된다는 데 대해 미국과 공감대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북한은 과거에 3자회담을 주장한 적이 있으므로 일단 이같은 다자적 방식에 긍정적일 것으로 봅니다."
-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평화·군사문제를 남북한 당사자가 풀어가는데 있어서 남한이 그만한 역량이 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미동맹 상황에서 남한의 역량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한반도 평화구도가 다자적 구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좀더 주도적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진행하려면 우리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습니다. 한미관계에서 우리가 얼마만큼 입지를 세우고 자율성을 확보하느냐, 이에 따라 평화·군사문제에 있어서 남한이 당사자라는 점을 북한에게 어떻게 분명히 인식시킬 수 있느냐는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임은 틀림없습니다. 한미동맹의 운용 구조를 개선하는 작업이 있어야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을 경우 김정일 위원장이 답방해 평화선언을 하는 등, 평화·군사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합의를 하더라도 그 실효성은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 한미군사동맹의 개선을 강조하셨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들을 개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여러 가지 변화의 계기와 환경은 있다고 봅니다. 안보 환경, 특히 북한의 위협이 감소한다면 한미동맹관계도 구조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한미동맹과 북한 군사력은 상호 대립적 구도로 되어 있으므로 후자가 바뀌어야 전자가 바뀐다고 한다면 현실적으로 엄청난 시간이 걸릴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두 가지의 문제를 동시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전시작전권 등 구조적 문제의 해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렇게 될 경우 북한이 한반도 평화·군사문제를 미국하고만 얘기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는 힘들어질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도 한미동맹관계에서 우리의 입장이 계속 강화되는 추세가 있었습니다만, 앞으로 구조적 차원에서 현재의 미국 주도가 계속될 경우 동맹관계의 장기적인 안정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미국과 솔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도 한미동맹관계의 미래 발전에 관한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최근 북한과의 군축협상 문제와 관련해서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문제를 다룰 주체의 문제를 놓고 한미간의 갈등이 일고 있습니다.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 감축 문제를 둘러싼 남북한 및 미국의 시각 차이를 소개해주십시오.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지난 6월에 미국이 대북정책 재검토 결과를 발표하면서 재래식 군사력 감축 문제를 의제의 하나로 포함시킴으로써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북한은 주한미군이 우선 철수한 뒤 남북한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우리는 기존에 남북기본합의서 등에 따라 남북 당국간에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 즉 '역할 분담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 문제가 한반도 및 동북아 지역안보에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자국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사실, 군축 협상이 조기에 진행될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실체보다 명분을 둘러싼 다툼이 있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미 양국은 6월말 우리 국방장관의 방미시 협의를 통해 우리의 대북 군사적 신뢰구축 노력을 남북기본합의서에 따라 추진하되, 긴밀한 협조하에 남북 및 북·미대화를 추진하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 한반도 군축협상이 진전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북한의 정책 변화가 필요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군축협상 이전에 먼저 군축을 해야 되겠다, 그리고 군축을 해도 되겠다는 인식이 공유되어야 합니다. 즉 군축이 평화 보장이나 체제 회생을 위해 절실한 과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며, 또 군축을 해도 국가안보 유지에 문제가 없다는 확신, 즉 군사적 신뢰구축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다만, 북한으로서는 현재 극도의 과군비 상황에 있고 그같은 군중시 정책이 그들 체제를 일정 부분 떠받들고 있기 때문에, 조기에 이같은 협상준비 상황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 군비경쟁이 상대가 있는 게임이듯이 군축협상 역시 상호관계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한과 미국은 한반도 군축 협상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사실 한반도 군축 문제는 곧 주한미군 등 한·미 안보협력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안보구도 전체를 뒤흔드는 것일 수 있지요. 따라서 군축협상이 어느 정도 진전되기 위해서는 우리도 군축을 해도 좋다는 인식을 광범위하게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이같은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는 "북한은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 먼저 확신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주한미군 등 기존 한반도 관여 구도가 바로 영향을 받지 않고, 한·미의 독자적 구상과 계획에 의해 장기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남한 및 미국 역시 북한의 안보문제를 이해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 역시 미국이나 남한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험을 감소시키고 상호간에 신뢰를 증진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들이 조기에 논의되고 추진될 필요가 있습니다."
-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재가동되기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노선 완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을 비롯한 남북한 정부간의 대화 재개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돼 왔습니다. 그러나 이 둘 모두를 기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교착상태를 풀기 위한 실마리가 있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시 정부의 대북 노선은 점차 조정되고 현실화되는 추세에 있다고 봅니다. 정부 출범 초기 강력한 대북 의구심을 표시하고 대북정책 재검토도 더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습니다만, 결국 대북 협상 용의라는 차원에서 결론이 나왔습니다. 최근 파월 장관은 북·미대화에 전제조건이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앞으로 상황 전개에 따라 부시 정부의 대북 노선이 더욱 현실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남북대화 재개는 위의 미국 변수 이외에 여러 조건이 맞아야 가능할 것으로 봅니다. 당장 북한은 북·러정상회담의 후속조치들이 나오고 또 9월의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 방북 등이 끝난 뒤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나설 여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올 10월에는 상해 APEC 정상회담과 부시 대통령 방한 등이 있는데, 이같은 계기들을 통해 한·미의 대북 회유 또는 지원책이 마련된다면 대화 재개가 더욱 가능할 것입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는 남북대화가 일단 정상화된 뒤에 가능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내 답방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할 경우 내년에라도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이와 관련해서는 앞서 말씀드린 문제들, 특히 전력지원 문제 등에 대한 미국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네바합의와의 관련 등 제반 문제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선행하고 이를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함으로써 미국의 양해, 또는 한미 공동으로 전력이나 식량 등 대북 지원을 제공할 경우 국내의 부정적 여론도 불식하고 북한의 한·미에 대한 거부적 태도도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현재의 교착상태를 풀 수 있는 길 가운데 하나는 한미관계 개선을 위해 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외교력을 발휘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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