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은 이제 IMF도 무사히 넘긴 것도 같고, 불구대천지 원수취급하던 남과 북이 대화를 하고, 서로 공개적으로 방문하고, 이젠 서슴없이 통일을 거론하기에 까지 이르른 발전하고 진보된 나라에 살고 있는 듯 하다.
더우기 실시간으로 전세계가 하나가 되어 양방향으로 교감하는 가히 경천동지할 온라인의 삶을 구가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세상에 아직도 20여년의 세월 저 건너편의 아픔을 곱씹으며 현재 진행형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공간이 있다.
1980년 5월 18일, 이들은 살인마 전두환 도당을 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반체제 민주인사도 아니었고, 민주의 전사 시민군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학생운동권의 선봉에 서서 소영웅의 사자후를 토하던 골수 운동권도 아니었다.
더러는 대학 기숙사생으로 더러는 시골 통학생으로 또 더러는 대학 동아리의 막내 심부름꾼으로 그 어수선한 1980년의 봄을 대학에서 전두환에 반대하다는 공통점 외에는 어쩌면 이들은 서로의 생각과 꿈과 삶의 색채가 전혀 다른 사람들 일 수도 있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1980년 5월 17일과 18일의 경계선에서 그들의 아픈 사연은 시작된다. 전두환 일당이 동원한 금마공수 부대원들이 전북대학교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5.18의 첫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세종, 79학번, 전북대 농대 2학년, 아직도 사인에 대한 많은 의문부호를 남겨 놓은 채 온라인상에서 작은 모임이 시작되었다. http://www.freechal.com/80518
그날, 그들은 밀폐된 무기수송차에 짐짝처럼 실려서 전주경찰서를 거쳐 전주 부근의 예비사단의 헌병대 유치장에 불법구금 된다. 더러는 '인후공사'라는 간판을 단 보안대에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두들겨 맞는다. 삼사개월씩 그날 학교 농성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광주 5.18의 그 기간동안 죽음을 넘나드는 불법구금을 당해야 했던 대학생들이었다.
지난해 5.18에 시작된 그들의 온라인모임
http://www.freechal.com/80518 은 56명의 회원을 유지하며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려고 몸부림 아닌 몸부림 쳐 왔다. 지난해 그들은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광주 제4차 보상'을 이끌어 냈다. 두해가 되어가는 그들의 조용한 온라인 모임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그들의 상처를 그들 스스로 치유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2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 뛴 절제력으로 조용한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http://www.freechal.com/80518 의 웹마스터는 '김환수'씨가 맡았다. 전국 각지의 비슷한 처지의 아픔들이 모여 게시판과 방명록을 수놓고 있다. 자료실에는 각종 기록과 자료들이 담겨 있고 이 '80518' 웹은 전국적인 방문자층을 이루며 서울, 강원, 영.호남을 어우르는 자리로 자리를 잡은듯 하다.
지리적으로 광주와 가까운 전주의 전북대가 중심이 되었고 이들은 자칫 폭풍의 중심에 있지 않아 역사속으로 묻힐 뻔 했던 그날의 불법연행구속자들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이끌어 냈다.
모임의 총무인 '김성숙' 씨가 그 게시판에 지적하듯 '시작은 있으되 끝이 없어 보이는 진한 삶의 행보'를 이곳은 다시 시작한듯 하다. 더러는 해외에서, 더러는 성공한 전문가의 모습으로, 더러는 20년이 지난 이제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모습으로 한국 사회의 드러나지 않은 힘으로 모여지는 듯 하다.
'유광석'씨가 '이세종'열사의 마지막을 묘사한 '생과 사의 갈림길'처럼 게시판과 자료실에는 우리가 지나치기 쉬웠던 역사적인 현장증언들도 눈에 띈다.
덧붙이는 글 | 이상원 기자는 그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했던 광주 4차 보상 대상자 중에 한 사람이며 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그후 도미하여 환경공학박사로 미연방정부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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