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오늘] 실리주의와 명분주의!

실리주의와 명분주의의 충돌인 인조반정의 아픔....그리고, 오늘의 현실...

등록 2001.09.15 11:09수정 2001.09.1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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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5일 남북장관회담을 앞두고 보수성향의 정당으로 알려진 한나라당은 북한측이 아웅산 테러사건을 사과하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구를 통한 정치공세라는 반대여론도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정권 혹은 김대중정부, 김대중 정부의 집권 이래로 두 정치세력의 충돌은 국회의 공전으로 징표되는 많은 정치적인 대립과 반목을 거듭했던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특히, 한나라당 측에서,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전통적인 친미반북의 역사와 지역정서를 바탕으로 대통령과 정부를 사회주의 정권으로 비난하는 등, 색깔론을 제기함으로써 충돌은 첨예화되어 왔었다.

그런 오늘의 현실을 정의하자면, 명분주의와 실리주의의 충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분주의와 실리주의의 충돌은 임진왜란이 끝난 조선후기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전쟁 후유증극복을 위한 철저한 실리주의 정권인 광해임금과 망해가는 명나라를 신봉하며 정권에 대항하던 서인들, 병자호란 당시의 강경파와 화친파, 정조임금의 독살의혹까지 제기되었던 조정의 암투, 척사운동과 개화운동 등 다수의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살펴보면, 인조반정으로 표출된 명분주의와 실리주의의 대립의 교훈이 오늘의 교훈으로 비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서자출신으로 그 능력과 임진왜란 당시의 공을 인정받아 서인정권이 지지하던 나이어린 적통왕자인 영창대군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던 광해임금, 그는 서울탈출에 이어 중국과의 국경지대인 의주까지 몽진한 선조를 대신하여 조정을 분할하여 이끌고 전장의 최일선에서 전쟁의 승리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야만성과 폭력 앞에 죽어가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던 현실을 눈 앞에서 체험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조선에서 더 이상의 전화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며, 국난극복을 위해 철저히 실리주의 정책을 펼쳤다.

광해임금은 심복인 강홍립을 명나라를 위한 원군으로 보내면서, 은밀히 상황에 따라 청나라에 항복하여 조선이 전화를 당하지 않도록 했을 뿐 아니라, 대동법의 부분적 시행과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를 다시 개간하여 조세원을 튼튼히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문화유산 등을 복구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한편, 북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등장한 광해임금 시절인지라, 영창대군의 옹립을 주장했던 서인들에게는 정권에서 소외되는 아픔이 있었다. 그 결과 서인들은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권토중래하는 심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광해임금을 핍박했고, 끝내 광해임금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왕대비를 유폐시키는 실책을 범하자, 이를 빌미로 무력쿠데타인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한다.

그런 서인들의 반정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했던 주제가 있다. 그것은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서 조선을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하며, 유교국가로서 형님의 나라인 명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서인들의 명분론과, 명청교체기라는 국제정세의 현실을 파악하고 조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는 신흥국가인 청나라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실리론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인 군주는 실리주의자였기에 서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인들은 광해임금의 실리주의를 불의하고 부당한 것으로 몰고가는 네가티브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그런 전략의 기초에는 광해임금의 약점인 서자출신 왕통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는데, 세종대왕 이래로 적장자의 왕위승계가 이상적인 원칙으로 받아들여졌던 조선사회인 점을 감안하면 광해임금에겐 심각한 컴플렉스의 요인이었다.

또한,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살아있는 한 언제 왕권을 빼앗길지 모르는 것이었으며, 왕권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마침내, 서인들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리다 못한 광해임금은 왕권의 경쟁자이며, 정적들이 추대하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어머니인 대왕대비를 유폐시킨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것이 반정의 가장 큰 빌미가 되었다는 것을! 서인들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고, 광해임금을 의리가 없을 뿐 아니라, 패륜한 임금이라고 정의내리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조선이 다시 명분론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가 됨에 따라, 전화의 극복과 국가재건의 기세는 꺾이고 말았으며, 또 다른 전쟁인 병자호란을 자청함으로써, 조선왕조는 겉잡을 수 없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과정은 대안없는 명분주의는 국가를 쇠퇴의 길로 가게한다는 교훈을 남기며, 현재 한나라당과 김대중정부의 명분주의대 실리주의의 대립에서 한번쯤 되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조선재건의 선봉장 광해임금과 서인들은 국가발전을 위해 합심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명분주의와 실리주의는 조화를 이룰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역사 속에서의 부조화는 권력 앞에 선 인간의 한계라고 보여진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 상대의 내면까지 비수를 들이대면서 상처주는 인간의 잔인함과 탐욕, 그것은 조화를 통한 화해와 협력을 붕괴시킨 것이다. 광해임금의 집권전부터 선조에게 광해임금의 컴플렉스를 자극했던 서인들이, 광해임금의 집권 후에도 국가보다는 권력을 위해서 광해임금의 컴플렉스를 들쑤셨으며, 심지어 명나라로 사람을 보내서 광해임금이 서자임을 내세우고 왕위승인을 못하도록 방해까지 했던 것은 권력에 대한 참으로 놀라운 집착이었다. 그리고, 방해공격을 받은 광해임금에게 있어서는, 인간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그래도 광해임금은 왕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려운 일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우선, 조선은 유교중심국가였고, 광해임금이 서인들을 포용한다고 하더라도, 적장자 중시, 명분중시의 유교이념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 개국 이래로 왕권과 신권은 끊임없는 시소게임을 통해 우열을 주고받으며 조화를 꾀했던 것처럼 왕의 전횡에 대해 신하들의 저항은 이념적으로 인정되었던 점, 그리고, 반정에 의해 왕권에서 물러나고 죽음을 당한 역사는 광해임금에게는 타협와 포용이 어려운 이유였던 것이다.

그리고, 맹자의 민본주의에서 보여지듯 왕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유교이념하의 선비는 왕보다도 백성을 더 위하여야 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따라서, 광해임금 역시 백성을 위해 일했지만, 그것을 전면부정하며 왕권의 제한과 전복에만 힘쓰는 서인들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편, 광해임금의 집권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선조임금 당시에 오랜동안 집권해온 서인정권에서 소외된 북인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은 부조화의 또 다른 이유이다.

천신만고 끝에 정권을 잡은 북인들에게 소외되었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인들에게 나누어줄 관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광해임금의 실각은 곧 북인세력의 몰살을 의미하였기에, 살기 위해서라도 영창대군의 죽음을 재촉했던 것이며, 서인들과의 극단적인 대립의 길로 갔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결국 조선왕조는 국가재건과 발전이라는 이상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서인들의 영창대군 옹립주장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나이어린 임금이 전후의 폐허를 극복할 능력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명분에 매달려 광해임금을 핍박했던 것은 사실상 영창대군의 죽음을 야기한 원인이었으며, 실리주의자 광해임금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감정적인 대립은 당연한 결과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오늘날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광해임금에 대한 동정이 더 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유능했으며, 올곧았지만,쿠데타로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인정권의 쿠데타의 명분이 패륜이었지만, 광해임금의 입장에서 수긍할 점이 더 많다는 점, 비슷한 쿠데타로 폐위된 연산군과는 달리 끔찍히도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다는 점으로 인식되어지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광해임금에서 인조임금에게로 정권이 옮겨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과정은 어쩌면, 오늘의 정국에서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보여진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초부터, 전쟁에 준하는 위기로 받아들여졌던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마지못해 정권을 인정했지만, 이내 조금 잘 돌아간다 싶으니까, 야당이 취했던 공세가 선거 전의 공세인 이른바 색깔론이다. 조선시대의 유교이념 못지않은 강력한 이데올로기인 반공의 깃발을 들어 정권을 용공으로 몰아가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논쟁, 대북지원에 대한 '퍼주기 공방', 미국의 정책에 기대어 햇볕정책 망치기, 통일부장관의 해임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그런 야당에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민련과 공조하여 국회 내의 과반수를 인위적으로 확보하여 정국을 운영했고, 오랜 동안 용공으로 매도되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컴플렉스는 사회정책 등 다양한 정책의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급박하게 진행된 정책들이 실패하면서, 오히려 한나라당에게 역공을 당한 형편이고, 급기야는 자민련과의 공조도 깨지면서 소수파여당이 되었다.

또한,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권의 지지자들은 그 집권과정에서의 공조와 현실적인 정국운영을 위해 자민련과 공직을 나누어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새롭게 공직에 등장한 인물들이 50년 동안 현재의 야당의 뿌리인 보수정당의 관할하에 있었던 관료들을 장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실상 사회정책의 실패나, 각종 정책에서의 곤란함을 가져온 숨겨진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김대중 씨의 지지기반인 민주당 정치인들은 한나라당과의 관계에서 다소 극단적인 양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광해임금, 한나라당과 서인들, 각각 실리주의자, 명분주의자라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고, 명분주의자들은 실리주의자들의 컴플렉스를 집중공략하는 네가티브전략을 구사했고, 실리주의자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 빨리 국가발전을 도모하다가 오히려 좌초되는 형국으로 보여진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그것은 부질없는 질문이다. 그때그때의 현실에서 입장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오는 까닭이다. 하지만, 오늘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안녕과 평화, 발전이다. 따라서, 그러한 목표를 생각한다면, 대안 없는 명분주의는 국가를 쇠퇴시킨다는 교훈, 상대방의 내면의 컴플렉스를 극대화시키는 네가티브 전략은 상대방을 서두르게 만들기 때문에 국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교훈, 비록 억울하고 부당한 정치공세가 있을지라도 국가원수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교훈이 남는다.

현재의 대북정책에서 평화를 위한 대화의 근본은 상호신뢰이다. 신뢰는 일관된 의지와 행동으로부터 나온다. 또한, 명분에 치우친 사대주의적 의존이 아니라, 실리적인 자세로 때론 주변의 상황을 이용하는 지혜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50년간의 분단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는 지나친 명분론보다도 실리주의와의 조화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대북정책의 진행과정에서 여야는 이러한 점과 역사의 교훈을 살펴, 대오를 범하지 않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평화로운 나라, 통일한국를 물려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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