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농심, 도심서 폭발

충남 농민 1000여명, 근본적 쌀 대책 촉구

등록 2001.09.18 17:00수정 2001.09.19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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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10시 40분,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목곡리. 90년 만의 가뭄과 수해에도 불구하고 800여 평의 논을 가득 메운 고개숙인 벼가 하나 둘씩 힘없이 쓰러졌다.

1년 동안 피땀 흘리며 가꾼 자신의 논을 갈아엎는 광경을 차마 지켜보기 어려웠던지 논 주인인 김창영 씨는 끝내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의 쌀 증산 독려와 추곡수매 보장만을 믿고 묵묵히 땅을 의지하며 살아온 김 씨는 결국 정부의 쌀 정책포기에 실망, 자신의 품삯조차 받을 수 없는 피같은 논을 갈아엎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착잡합니다. 1년 동안 피땀 흘려 지은 농사인데...", "한 해 농사를 포기하는 데 피눈물 나죠..."

같은 마을 김 씨의 논이 갈아 엎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김정태(49, 가야곡면) 씨는 허망하게 쓰러지는 벼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이어 "올해 들어 쌀금이 계속 떨어져 농사 지어봤자 품삯도 안나오고 농협 빚만 늘고 있다"며 "연말에 조합(농협)에서 집 독촉을 할텐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다"고 전했다.

농민들에 따르면 지난 해까지만 해도 80kg 한가마에 17만원 가까이 하던 쌀 값이 올해 들어 현재 15만원 정도까지 떨어지고 있어 큰 걱정이라고 전했다. 전농 충남도연맹 허충회 부의장은 "당진지역은 이보다 더 심해 13만원 대까지 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 추수를 앞둔 농민들의 시름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잇단 농정 실패에 무너진 농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난 4일 정부의 쌀 농업 포기 선언과 다름없는 '쌀산업 중장기 대책'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지난 15일 경남 창원에서 영남지역 농민들이 민중대회를 통해 현 정부의 농업실정을 규탄한 데 이어 17일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의장 정수용)은 대전역에서 충남지역 1000여명의 농민이 참석한 가운데 쌀값 보장 및 추곡수매 보장을 요구하며 삭발과 함께 쌀을 불태우는 등 대 정부투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특히 농민들은 현재 정부가 추진하겠다고 밝힌 '쌀산업 중장기 대책'을 쌀 농업 포기 정책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강력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향후 지역별 투쟁과 농민들의 상경 투쟁이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월 4일 정부가 발표한 '쌀산업 중장기 대책'의 주요 골자는 쌀 증산정책 포기와 추곡수매제도 폐지로 귀결된다.

2004년 WTO 쌀 재협상이 임박한 시점에서 소비부진과 과잉생산으로 약 1100만섬에 이른 쌀 재고가 누적되는 등 국내 쌀산업 여건이 달라진 데다 국내외 쌀값 차이가 점점 커져 국제경쟁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정책기조를 바꿀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이 대책에 따르면 정부는 내년부터 증산정책을 위한 정부의 직접개입을 포기하고 미질 위주의 생산정책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추곡수매가를 안정화시킨 데 따른 쌀값 하락으로 발생하는 농가 소득감소분은 논농업직접지불제의 보조금을 높이는 방법으로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수확기 산지 쌀값이 일정 수준 이상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 쌀값 하락분의 일정분을 보상하는 '미작경영안정제'를 2003년부터 시행하는 등 다양한 직불제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쌀 정책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농민들은 거의 없다. 농민들은 이번 정부의 발표가 언론을 통해 교묘히 농민들을 우롱했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올해 정부의 추곡수매 물량과 관련해 농민들은 정부수매 1352만섬 중 정부가 직접 수매하는 물량은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575만섬 이지만 실제 직접 수매물량은 그 절반인 289만 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머지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농민들인 농협에 수매 물량을 떠넘겨 결국 농민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 전농의 분석이다.

또한 정부가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는 수탁판매제 및 시가 매입제도의 경우도 생산비 보장이 전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정부가 쌀에 대한 가격 지지정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전농은 이미 지난 4일 정부의 중장기정책 발표 직후 "이번 정부의 쌀 정책은 쌀시장 개방을 기정사실화 해 주곡인 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고 가격지지 정책만 축소함으로써 농가소득 감소와 쌀 농사 포기를 유도하는 정책"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정책 철회를 요구한 바 있다.

17일 충남 농민대회에서 정수용(전농 충남도연맹) 의장은 "90년 만의 가뭄에 밤잠을 설쳐가며 물을 대 겨우 수확할 수 있게 됐는데 기쁨과 감사의 추수를 기다려야 할 우리가 자식같이 키워 온 쌀을 팔 것인가 말 것인가를 왜 고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96년 쌀 재고가 바닥났다며 한치의 논도 놀리지 말고 쌀 증산을 독려했던 정부가 이제와서 쌀이 남아 돈다고 추곡정책을 바꾸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정부 정책의 잇단 혼선으로 총체적인 농정 파탄에 직면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17일 대전에서 열린 충남 농민대회에서는 "쌀값 보장"이 농민들의 가장 절박한 요구로 표출됐다.

농민들은 이날 집회를 통해 추곡수매제와 국회동의제 폐지 절대 반대을 요구하는 한편 추곡 수매량 1352만 섬 정부 수매가 수매, 쌀값 보장없는 수탁판매제, 시가매임제 반대 등의 구호를 통해 정부의 쌀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농민들은 이와 함께 정부가 정책변화의 주요한 요인으로 꼽고있는 1100만섬에 이르는 재고물량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현 재고 물량이 지난 93년의 경우처럼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와 전 세계적으로 식량의 무기화를 추구하는 점을 감안 할 때 결코 많은 물량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통일 시대를 대비해 현재 남아도는 물량의 경우 식량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에 대한 지원으로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난 농민, 도청 앞 극렬 시위로 이어져
충남도 늑장 대응, 화 자초


한편 오전 논산시 가야곡에서 추수포기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오후 2시 30분부터 진행된 전농 충남도연맹의 농정파탄에 대한 항의 시위는 5시경부터 시작된 거리행진이 충남도청에 이르러 경찰과 충돌하는 등 극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날 농민, 경찰의 충돌은 당초 농민회에서 농정파탄의 책임을 물어 민주당 충남도지부 앞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를 개최할 계획이었지만 농민회가 행정부지사의 신변보장을 수차에 걸쳐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도 책임자의 답변을 계속 늦추는 바람에 농민들을 자극, 화를 자초했다.

결국 이날 시위는 도청앞에서 도청진입을 시도하는 농민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의 3차례 대규모 충돌로 부상자 및 연행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2시간 여가 흐른 저녁 7시 30분 경 이명수 행정부지사가 농민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 9월말까지 '범도민 쌀 대책기구'를 구성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일단락 됐다.

이날 농민들은 충남도와 민주당 충남도지부에 보내는 공개 질의서를 통해 현 농정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입장을 전달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세워줄 것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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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 민언련 매체감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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