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론 브란도의 왕국―Apocalypse now

방민호의 <문화칼럼> 전쟁 너머의 세계

등록 2001.09.24 14:24수정 2001.09.2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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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에 있는 하명중의 뤼미에르 극장에서 <지옥의 묵시록>을 새로 보았다. 물론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이다. 십 몇년쯤 되었나. 그보다 먼저 퇴계로의 한 극장에서 70mm 대형 스크린으로 <지옥의 묵시록>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는 것과 몇몇 장면들 외에 구체적인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다시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살인지령을 받은 마틴 쉰이 타고 갈 보트를 강어귀 해안에 내려놓기 위해 네이팜탄 공격을 감행하는 미친 대령의 바그너 음악과 윈드서핑과, 우리의 엉거주춤 야한 문선대 공연을 생각나게 만드는 야하디 야한 바니걸즈 쇼와, 민간인 배를 수색하던 끝에 죄없는 사람들을 몽땅 벌집이 되도록 쏘아대는 장면과……. 그런 것들이 내게 남아 있는 기억의 대부분이었다.

이제 다시 본 <지옥의 묵시록>은 옛날의 내가 이 영화를 전혀 그 지닌 가치만큼 알아보지 못했음을 깨닫게 했다. 영화는 20세기 최고작이라고 할만큼 훌륭했다. 마치 넋이라도 나간 것처럼 자막이 다 오를 때까지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관객들을 본 것도 오랜만이었다. 극장을 나온 후 그들은 심각한 철학자의 얼굴, 몽환적인 눈으로 힘이 다한 듯 비칠비칠 걸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의 뒷모습 때문에 나는 우울하면서도 유쾌했다.

이 <지옥의 묵시록>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이 어디일까. 그 날의 내게는 마론 브란도의 왕국이 그러했다. 커츠 대령으로 분한 마론 브란도는 강이 끝나는 지점에서 베트공과 남베트남인과 프랑스인과 미군과 캄보디아인들이 뒤섞여 있는 왕국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강의 마지막 미군 기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고 병사들은 책임자를 잃고 다만 총질을 해댈 뿐이었다. 그 화염에 휩싸인 최전선 미군기지란 곧 역사의 종말점, 또는 종말점 같은 곳이 아니겠는지.

그곳을 지나 강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비로소 마론 브란도의 왕국이 나오니 그곳은 곧 역사를 넘어선 지점이다. 그러나 역사를 넘어선다 해도 살육과 파괴와 불신의 역사를 넘어선 곳에는 새로운 야만의 얼굴을 한 왕국이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시콜로>라는 베트남 소재 영화가 있다. ―왜 새삼스럽게 <시콜로>냐고 물을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순접을 피해 단락과 단락 사이의 단속과 비약을 즐긴다고 말해야 하리라. <시콜로>를 만든 이들은 마지막 부분에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생명체도 죽이지 않았다는 글귀를 남기고 있었다.

지금 나는 마론 브란도의 왕국에서 벌어진 사육제를 생각하고 있다. 미국 군부의 지령대로 마틴 쉰이 마론 브란도를 '암살'하고 있는 동안 그의 왕국의 신도들은 제단에 바칠 검은 소를 커다란 칼로 무참하게 살해하고 있다. 나는 그 소가 화면 효과 아닌 진짜 소이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위선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의 '채식주의'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다른 생명만이 아니라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 무참한 살육을 주저 없이 감행하고 있는 역사 속에서. 나는 실제로 죄 없는 생명을 죽임으로써 인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를 명백하게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처참한 예술적 상징, 또는 예술을 넘어선 희생제의가 될 것이므로.

참으로 제국답게 미국은 모든 면에서 위대하다. 베트남 전쟁에 <지옥의 묵시록>이라니.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짓고 가장 처참한 테러를 당하고, 정의 없는 전쟁을 기도하면서도 그것에 '무한정의'라는 역설적 명칭을 붙일 줄 알다니.


이제 그 새로운 전쟁에 또 어떤 위대한 영화가 뒤따르려는가. 그러나 그 영화는 마론 브란도의 왕국을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이 이미 전쟁으로 점철된 지금(now) 이후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 버린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을 정녕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자는 Bush가 아니라 바로 Coppola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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