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의 <예술의 규칙>을 읽고

자율적 장을 만들어가는 싸움

등록 2001.09.30 16:42수정 2001.09.30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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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규칙 읽고

Y선생님.
방학을 맞아 공부는 많이 하고 계십니까? 저는 백낙청 씨가 '공부길'이라는 특이한 단어를 쓰고부터 혹은 만화를 통해 중국인들이 무술수련을 '공부'라고 한다는 것을 알고부터, 공부라는 단어가 시험이라는 접두사와 떨어져서 쓰일 수 있음에 묘한 해방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무협만화의 주인공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두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해요").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 중에 역사나 철학을 모여서 공부할 때 사용하던 학습이란 단어도 요즘은 공부방같은 단어와 함께 좀더 유순해진듯 합니다.

방학 동안 저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예술의 규칙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제가 그 동안 해설서로 접해오던 프랑스 철학 혹은 사상에 대한 호기심에 구체성을 부여해주었습니다. 그 전에 선생님께서 프랑스 사상을, 혹자들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참 고급이다'라고 말한다고 하신 것을 잊지 않고 읽었습니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장'이라는 개념을 예술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 이 책이 예술에 적용되고 있지만, 철학이라는 장이나 지식이라는 장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더군요.

마치 철학이 한 시대를 대표할 절정에 도달할 때마다 '미학'을 정리해 자신의 철학적 '논리(이성)'가 마침내 예술마저 설명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해왔듯이, 이제 사회학이 또 다시 그 일을 하고 있더군요.

이런 논리적 이성의 언어에 대해서 예술은 늘 벙어리임을 자임해 왔습니다. 자연이 인간의 이해와 분석에 대답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하지만 '세계의 무관심'이 인간을 두렵게 하고 끊임없이 도전하게 하듯이, 예술도 그러하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예술도 분명히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술도 인간의 분명한 사유방식입니다. 내가 아닌-세계를 나인 것으로 순간적으로 비약해 버리는, 그럼으로 해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비결정적인 사유를 통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끊임없이 미전개의 소재를 이성적 사유에 대하여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고, 혹은 구체적 개별적 실재가 감추고 있는 존재의 숨겨진 부분을 이성적 사유를 앞질러 찾아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르디외는 이런 미학적인 이해가 역사의 적극적인 망각 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질적 분석(형성된 역사적 산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건들을 지워버리는)에 대한 저항을 느낄 수 있다고 할까요?


그 역사적 조건들을 부르디외는 점진적으로 형성되어가는 제도로 파악합니다.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세계인 예술장의 형태"인 "느린 출현과정의 산물"과 "두뇌들 속에서 장이 발명되었던 바로 그 움직임 속에서 발명된 성향들의 형태". 이렇게 천천히 발명된 예술장에 즉각적으로 적응한 성향들이 예술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는 거죠. 부르디외는 이런 우스개 소리를 합니다.

<미술관들은 그들의 현판에 "예술애호가가 아니면 누구도 여기에 들어올 수 없음"이라고 쓸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자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즉 예술적 경험이라는 것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처럼 그 게임의 규칙에 이미 동의한 사람들의 특수한 경험이란 것입니다. 저는 결국 프랑스 사상의 특징이 통시적인 보편성을 얘기하기보다는 특수한 역사적 공간적 한계 속의 현상을 분석한다는 누군가의 설명을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잠시 유보하기로 해야겠습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군자라고 하신 공자말씀처럼요.

저는 예술의 규칙을 읽으며, 19세기 자본주의의 형성기에 부르조아지가 구축한 권력의 아성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의 분투를 느껴보았습니다. 그저 낭만주의 운동 정도의 피상적인 이해를 하고 있던 제게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장을 구축해왔던 근대의 숨겨진 역사를 일깨워줬다고 할까요?

하지만 저는 한 세기가 지나가며 그 규칙은 치명적으로 깨어졌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술장의 자율성의 규칙은 장내부의 하부에 속해 있는 대중작가들이 타율성의 원리를 끌어들여 허물게 된다는 부르디외의 암시를 느끼며, 저는 어느 대중가수가 "나는 단지 안팔린다는 이유로 언더가수라는 말은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던 것을 떠올렸습니다. 이 말을 제 이해가 맞다면 부르디외는 19세기에 형성된 예술의 장이 권력장에 흡수되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부르디외는 "입법자 보들레르"라는 표현을 쓰면서, 하지만 사실 예술장의 모든 구성원은 (작가, 학교 교육자, 감상자, 예술상인 등등) 법을 만드는 데 관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Y선생님.
부르디외는 사회학자로서 예술이 사회적 규칙에, 그러니까 각각의 위치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들에 따른 위치취하기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영웅만들기는 거절합니다. 보들레르는 입법자인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들의 투쟁 속에 살아남은 법일 뿐이겠지요. 이때 살아남은 것이 최고라는 시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싸움에서 패배한 법도 분명 한 가능성이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가능성들의 투쟁이 형성되는 장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용가능한 모든 것이 투쟁에 쓰일 수 있겠지요. 새로운 장의 규칙은 근대가 만들어낸 자율성이란 장막을 이해하되 더 이상 협소화되지 않는 것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앞에서 예술도 사람의 사유방식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이성적 사유와 함께 예술적 사유가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으로 발언할 수 있는 새로운 기점을 생각해봅니다. 새로운 장의 가능성을 말입니다.

Y선생님.
저는 프랑스 사상에 대한 이해를 좀더 깊이 가지고 싶어집니다. 이 공부길에서 저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요. 아니 그것을 묻기보다는 아직은 이 길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도취는 바쁘게 하기보다는 게으르게 하는군요.

이 두서 없는 중얼거림을 선생님과 함께 한 한 학기에 대한 애정이라고 둘러대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길 위에 어느 시인의 이런 축복을 던지고 싶군요.

"이제 사람들이 알 시간이다!
이제 돌이 꽃 필 준비를 할 시간,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릴 시간이다.
시간이 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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