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서울에 떠있는 외로운 섬 하나, 경복궁

등록 2001.10.04 23:57수정 2001.10.08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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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광화문이여,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중략) 오오,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서글프게 생각할 것인가.(중략) 광화문이여, 장수했어야 할 너의 운명이 단명으로 끝나려 하고 있다.(후략)”

이는 일본의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2년 9월호 <개조>에 발표한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의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발췌한 것으로,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완공한 후 광화문을 헐어 없애려 했을 때 반대여론을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던 글이기도 하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인마저 경악하는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에 의해 허물어지고 원상을 잃은 문화재는 비단 광화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경복궁을 들어서는 순간,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게 된다.

경복궁에 가자고 하면 먼저 지하철 3호선의 '경복궁역'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거기서부터 경복궁 답사를 시작한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엔 가기 좋아도, 그것은 진정한 답사를 하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경복궁역은 이미 경복궁 안으로 통하도록 연결되어 있어, 경복궁의 대문격이라 할 광화문을 정면에서 볼 수도 없으며, 경복궁을 품고 있는 백악을 조망할 수가 없다. 모든 문화재 답사가 그러하듯, 사용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아야 그 문화재의 진국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부터 답사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먼저 광화문역을 나서면 ‘비전’이 있는 곳으로 가자. 거기 서서 동서남북을 고루 살펴보자. 교보빌딩이나 철조망이 높이 둘러진 미 대사관 등으로 시야가 가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북쪽으로는 광화문과 백악이, 서쪽으로는 청와대가 있는 인왕산을 볼 수 있다. 또 동으로는 경복궁을 휘감고 있는 산자락과 멀리 북한산자락을 볼 수 있다.

이제 웬만큼 둘러보았으면 천천히 발걸음을 떼자. 세종로를 따라 걸어올라 갈라치면 길 한가운데 충무공상이 보인다. 세종로에 웬 충무공?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무공상이 거기 있을 이유가 없다. 또 ‘왜 칼을 오른쪽에 찼을까’하는 잡생각이 들기도 한다. 칼 찬 방향이야 충무공이 왼손잡이였다면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왜 세종로에 충무공상이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유 없는 결과가 있을까.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상무 정신을 선전하기 위해 세웠단다. 서울에서 거의 생활하지도 않은, 특히 경복궁과는 별반 관련이 없는 충무공상을 말이다. 차제에 세종대왕 상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조선의 육조거리(현 세종로)를 걷고 있다. 당시의 모습에 비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 세종로의 오른쪽으로 교보빌딩과 한국통신, 미 대사관이, 왼쪽으로는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가 들어서 있지만, 원래 조선시대에는 길 양쪽으로 여러 관청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고 머릿속으로나마 상상을 해보자.

한참을 걸은 후 세종로가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세종로 끝을 수직으로 달리는 율곡로로 인해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경복궁이 홀로 떠있는 섬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날도 쌀쌀해지기 시작하니 어서 길을 찾아야 한다.


율곡로를 따라 오른쪽(인사동이나 안국역 방향)으로 조금 가면 지하도가 나온다. 그 걸 건너서 동십자각 앞으로 나가보자. 동십자각은 원래 경복궁을 따라 있었던 궁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있던, 현대식으로 치자면 일종의 초소 비슷한 것이다. 허나 지금은 궁장은 헐려 온데 간데 없고, 동십자각만 도로 중간에 달랑 남아 세월의 무상함만 더해 주고 있다. 또한 동십자각 역시 광화문과 함께 대로를 새로 닦으면서 뒤로 나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제 생각은 멈추고 다시 광화문으로 향하자. 광화문에 이르면 해태(한자로는 ‘해치’라고 했다고 한다.) 두 마리가 보인다. 그러나 이놈 해태들은 원래 거기 있던 것이 아니라 한다. 그것은 세종로(당시 육조거리)에 있는 정부정합청사의 앞부분쯤에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해태는 관원들의 말과 행동을 올바르게 하도록 하는 기능을 하는 상상 속의 동물인데, 정부종합청사 위치에 시정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지금의 검찰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사헌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하던 것이 지금의 광화문 위치(광화문도 원래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후퇴한 위치에 있다)로 나앉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 그토록 많은 비리가 판치는 것일까

이제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략 두 가지의 경악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광화문을 유심히 살펴보자. 자, 광화문 지붕이나 기둥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을까. 참나무? 소나무? 정답은 놀랍게도 ‘콘크리트’ 나무이다.

일제에 의해 경복궁 궁장의 동북쪽으로 이전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앙상하게 잔해만 남은 광화문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역시 ‘직업정신’을 발휘해 철근과 콘크리트를 ‘무기’로 삼아 질서 정연한 서까래 ‘부대’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덧붙여, 아예 복원을 하려면 잘 해야지 경복궁의 축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다음으로 특이한 것은 편액이다. 보통 우리의 고건축에서는 편액을 한자로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쓴다. 예컨대 경복궁 외전의 중심인 근정전을 ‘殿政勤’이라고 표기하듯 말이다. 그러나 광화문은 어딘지 모르게 특이하다.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한글로 쓰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국어책처럼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광화문’ 하고 쓰여 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이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門化光’하고 쓰여져야 할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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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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