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들여다 보기

서울에 떠있는 외로운 섬 하나, 경복궁(2)

등록 2001.10.10 18:23수정 2001.10.1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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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의 답도로서,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왕이 가마를 탄 채 지나가는 곳으로, 어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권기봉

지난 1편에서는 경복궁을 밖에서 조망하는 것을 주로 다루었는데, 이번엔 경복궁으로 들어가 보자.

광화문을 들어서면 넓은 한창 공사중인 장면을 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지금 이곳에서는 흥례문과 회랑, 금천과 영제교를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 안내판을 조금 읽다가 경복궁역을 통해 빠져 나오는 이들과 한 무리가 되어 동쪽에 위치한 출입구를 향해 나아간다.


원래 근정전으로 가려면 광화문과 흥례문을 지나, 금천을 건너서 나오는 근정문을 통과해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근정문은 ‘문’이 아닌 듯하다. 굳게 닫혀 있어, 문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근정전을 보기 위해서는 근정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3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근정전의 지붕과 용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들어가는 문은 보이질 않고, 회랑 벽 한 중간이 뚫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남의 집에 갈 때 대문을 놔두고 담을 뚫고(넘어) 들어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그렇게 해서라도 들어가보자.

조선 제일의 장관이라고까지 불렸던 경회루다. 경회루와 그 연못 일대는 경복궁 내전에 딸린 일종의 정원이었다.ⓒ 권기봉

어쨌든 조정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조정으로 들어 온 것, 벽을 뚫고 들어왔다는 민망함은 잊자. 근정전을 보기에 앞서, 회랑을 따라 근정문 쪽으로 걷자. 회랑의 기둥들은 하나 같이 조정에 가까운 쪽은 둥근 받침을, 먼 쪽은 네모난 받침을 하고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관념의 일환이다. 무슨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냐고 웃을 일은 아닌 듯싶다. 집을 짓고 기둥 하나를 세우면서도 그곳에 하늘과 땅, 우주의 원리를 담으려 했던 그 철학적 면모를 인정하고,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울 일이다.

자, 이제 근정문에 이르렀으면 이제 북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들고 근정전을 보자. 근정전이 백악에 안겨, 포만감과 조화로움을 한껏 뽐내고 있을 것이다.

조정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는데, 한가운데가 가장 높은 세 구역으로 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중심의 높은 부분이 왕만이 (가마를 타고) 다녔다는 어도다. 왕이 된 기분으로 어도를 따라 조정을 가로질러 근정전으로 나아가자.


어도 양쪽으로 조정을 동쪽의 문반과 서쪽의 무반으로 나누는 품계석이 보이며, 종이품 품계석 뒤쪽으로 차일을 매는 데 쓰이던 쇠고랑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창덕궁의 그것과는 달리 정제되지 않아 자연스러운 멋을 더해주고 있는 화강암 박석들도 보인다.

향원정 - 원래는 이 부근에 수십 채의 건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헐려 없어진 상태이다. ⓒ 권기봉

유감스럽게도 2001년의 근정전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근정전 전체가 공사용 장막으로 높게 둘러쳐져 있어, 근정전에 가까이 가서 으레 거기 있을 ‘드므’나 ‘삼정’을 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근정전 내부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의 창덕궁 답사를 돌이켜 보건대, 근정전 내부를 보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내부를 들여다 보아봤자, 사람 살지 않는 건물의 내부에 온기가 넘쳐 날리 없을 것이며, 쇠락한 왕가에 위엄이 남아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는 답도와, 2층의 기단 위를 따라 삥 둘러 있는 근위 서수들이나마 몇 개 볼 수 있었다는 것일 게다.


이제 근정전 뒤의 사정전으로 들어가자. 이곳부터는 왕과 왕비가 일상 생활을 하는 공간, 즉 내전이다. 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과객일 테니, 왕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하겠다. 사정전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의 집무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근정전이야 가장 큰 건물이지만 왕이 직접 그곳까지 행차하는 일은 거의 없고, 대부분의 공사를 이곳 사정전에서 처리했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지만,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사정전 역시 쓸쓸한 느낌밖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다. 건물 내부에는 두 마리의 용이 놀고 있는 큰 그림 하나와, 누군가의 것으로 보이는 슬리퍼 한 쌍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정전 역시 현재는 죽어있는 건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정전의 양쪽으로 만춘전과 천추전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세 채의 건물은 서로 별개의 것으로 밖에는 파악되지 않지만, 원래는 당연히 이 세 건물이 모두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왕은 절대로 땅을 밟지 않았으며, 부득이 지나야 할 때는 가마를 타고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즈음 궁궐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들에서 보여주듯, 요즘 사람들은 왕이 신하들과 함께 마당을 거닐며 국사를 논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1895년(고종32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가 이끄는 일본 공사관 직원과 일본 낭인, 조선 신식군대인 훈련대 등이 '여우사녕'이라는 작전명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한 곳에 세워진 비이다. 그들은 경복궁의 뒤쪽 끝 건물인 곤녕합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찔러 죽이고, 그 시신을 그 옆의 녹산으로 끌고 가 석유를 끼얹어 불태우고 그 뼈를 그 앞 연못에 던져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 권기봉

한편 사정전의 앞 쪽 행각에는 무슨 창고인 듯 ‘天字庫’나 ‘地字庫’, ‘玄字庫’...... 순서로 표지판이 차례대로 걸려 있다(지금으로 치자면 1번 창고, 2번 창고, 3번 창고 등, 번호를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곡괭이나 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먼지밖에 보이는 것이 없지만, 이 행각은 활자 창고로 쓰였던 것이라고도 한다. 물론 실제로 활자 창고였는지는 아직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활자를 보관했던 적도 없진 않다고 하니, 조선 왕조가 활자 문화, 즉 정신 문화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지는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사정전 뒤의 향오문을 거쳐 강녕전으로 옮겨가자. 정면 11간, 측면 5간 해서 55간이나 되는 강녕전은, 궁궐 건축의 법도에 따라 당연히 왕의 침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 경복궁의 강녕전은 근년에 새로 복원된 것이고, 원래의 강녕전은 현재 창덕궁의 희정당으로 쓰이고 있다.

1917년 창덕궁 내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면서 경복궁의 강녕전을 창덕궁으로 옮겨 왕의 침실로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강녕전을 '강녕전'으로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강녕전을 만들 때의 혼과 정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만드는 공법도 지금은 시멘트를 ‘척척’ 발라가며 공사하지 않는가. 지금의 강녕전은 말 그대로 '건축물'일 뿐이지 '예술'은 아닌 듯하다.

ⓒ 권기봉

다음 차례는 당연히 궁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왕비의 침실인 교태전이다. 용마루가 있어서는 안 되는 왕비 침실의 이 이름을 두고 누구는 왕비가 왕에게 ‘교태’를 잘 부리라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다소 억지가 아닐까. 즉 교태전의 이름은 '嬌態'가 아니라 '交泰'이다. 이는 주역의 궤 이름으로, 위로 솟는 성질을 가진 양이 아래에 있고, 아래로 가라앉는 성질의 음이 위에 있음을 의미한다. 즉 교태는 왕과 왕비의 교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왕과 왕비가 서로 밤을 함께 보내며 아들(결국은 세자) 생산을 잘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다.

한편 현 교태전의 나이 역시 강녕전과 비슷하다. 1917년 창덕궁 내전의 화제로 교태전도 창덕궁으로 옮겨져 왕비 침실인 대조전(大造殿 ; 이 역시 '큰 것을 만든다'는 뜻으로, 의미가 사뭇 재미있다)의 부재로 쓰였다. 즉 현재의 교태전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근년에 들어 복원한 것이다.

다음 차례는 아미산으로, 아미산이라는 것은 중국 산동성의 박산현이라는 곳에 있는 명산의 이름인데, 이는 경회루를 파고 그 흙을 옮겨 쌓은 인공산이다. 아미산은 창덕궁 대조전의 화계에 비해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들어간 정성도 더 큰 듯했다.

이제 내전의 마지막 행선지 경회루로 이동하자. 내전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사위가 탁 트이면서 경회루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2층으로 이루어진 경회루는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은 것으로, 1층의 높은 돌기둥은 매우 웅장한 팔작지붕과 함께 경회루의 상승감을 더해주고 있다. 경회루는 35간 건물로 11개의 잡상(잡상은 건물의 지위와 품격에 다라 그 수에 차이가 난다)을 갖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건물에 존재하는 잡상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한다.

한편 ‘천원지방’의 관념은 경회루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경회루의 1층 돌기둥 중 바깥 쪽 기둥들은 단면이 모두 사각형이고, 안 쪽 기둥들은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연못 자체는 사각형인데 반해, 안쪽의 작은 섬은 원형으로 만듦으로써 그 관념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는 과정에서 나온 흙을 가지고 쌓은 일종의 인공산으로서, 왕비의 시어소인 교태전 뒤에 있다. 이는 한북정맥의 마직막 연봉인 북한산, 거기서 나온 백악산 가지가 만나는 곳에 조성되어 있다. 아미산은 교태전의 후원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예전에는 기괴한 돌과 화초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 권기봉

경회루의 남쪽으로 현재 보수 공사를 하는지 장막으로 덮여 있는 건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수정전으로, 세종 연간에는 집현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고 보니 수정전은 궐내각사 중에서도 가장 내전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로, 왕과 신하가 만나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경복궁에서도 창덕궁에서와 마찬가지로 남아있는 궐내각사는 하나도 없다. 이는 일제가 1915년 경복궁 내에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라는 일종의 엑스포(EXPO) 대회를 열면서 전시장 마련을 위해 수많은 궐내각사를 파괴했기 때문이다(물론 궐내각사들만 파괴되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궐내각사가 있던 경회루의 서쪽 일대에는 수많은 나무와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어 신랑 신부들이 결혼사진을 찍는 훌륭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을 뿐이다. 한편 원래의 궐내각사의 규모를 파악하고 싶다면, 그 궁궐 '무덤'의 대부분 공간에 건물이 거의 꽉 들어차 있었다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궐내각사 자리를 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겸, 이번에는 근정전의 반대편, 즉 경복궁의 동쪽으로 자리를 옮겨 보자. 그곳은 동궁, 즉 세자궁이 있던 자리이다. 물론 현재 세자궁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경복궁의 북쪽 끝 지역에 세자궁의 일부이던 자선궁의 석축만이 '불을 먹은 채' 쓸쓸히 서 있다. 자선궁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궁 건물들은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를 열면서 일본으로 팔려 갔다. 그러던 것이 대부분은 파괴 소실되고, 자선당의 석축만이 1995년에 우리 나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자경전의 다른 부분은 다 제외하고서라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보수공사를 하면서 자경전 뒤의 꽃담에 난 굴뚝을 막고 가두어 버렸다는 것이다. 자경전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꽃담 그 자체를 굴뚝('십장생 굴뚝'이라고도 불린다)으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를 보수 공사할 때 연가와 담장 사이의 구멍을 막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굴뚝 위에 덮개를 씌어 아름다운 꽃담만의 맛을 반감시키고 말았다.

자경전 뒤의 잔디밭(왕실 가족들과 궁녀, 내시 등이 생활하던 공간이었으나, 역시 건물은 온데 간데 없다)을 지나면 향원정과 매우 아름다운 연못이 우리를 반겨준다. 그 연못 역시 천원지방의 관념에 의해 네모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는데, 그 섬에는 육모 지붕을 한 2층 짜리 아름다운 정자가 하나 있다. 너무도 아름다운 연못과 정자이어서 그런지, 연못 주위로 이를 화폭에 담으려는 아저씨들이 꽤 보인다.

향원정을 지나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원래 그 자리는 1873년 고종이 일제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지은 건청궁이 있던 자리이다. 건청궁이 완공된 이듬해 조선왕조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게 되는데 건청궁의 곤녕합에서 일어난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건청궁 일대의 건물들 역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로 인해 대부분 헐려졌고, 지금은 비석 두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모두 명성황후를 기리기 위한 것인데, 각각이 모두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먼저 '명성황후조난지지(明成皇后遭難之地)'라고 쓰여진 비석은 이승만 대통령의 글씨인데, 왜 그가 그런 글씨를 남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과연 자격은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명성황후순국숭모비(明成皇后殉國崇慕碑)'는 더욱 가관이다. 이 비석은 명성황후를 여걸로서 숭모하는 뜻을 담은 비석인데, 비석 뒷면에 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 이들이 이름이 참 웃기다. 친일파의 이름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비석의 앞부분에는 대한제국의 문양이라는 오얏꽃이 새겨져 있는데, 역시 일제의 냄새가 풀풀 피어나기만 한다.

자경전 담의 일부에 있는 십장생 굴뚝이다. 마치 담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굴뚝으로서, 십장생을 비롯한 온갖 좋은 뜻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그러나 지금은 덮개를 씌어 놓아, 제 상징을 잃고 말았다. ⓒ 권기봉

건청궁 터에서 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내가 하나 나오면서 더 이상은 갈 수가 없게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철문 바깥쪽으로 전경들이 보인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청와대(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나가면 바로 청와대의 정문이 나온다.) 경비를 위해 들어선 30경비단인 것 같다. 1997년부터 철수를 시작해 뒷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지만, 아직은 들어갈 수 없는 듯하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경복궁엘 가더라도 태원전이나 회안전, 문경전 등을 볼 수가 없다.

창덕궁엘 가나 경복궁엘 가나 다소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특히 요즘 경복궁은 복원 공사가 한창인데, 제발 부실 속성 공사가 아니길 바란다. 용산에 들어서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만 하더라도 벌써 부실 설계 및 부실 시공 등, 총체적인 부실공사라는 지적이 흘러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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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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