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초등학교의 경시대회 열풍

입학하자마자 수영대회, 성악 경시대회, 피아노 경시대회 등 끝없이 이어져

등록 2001.10.05 11:20수정 2001.10.05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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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와 저는 같은 해에 결혼을 해서 같은 해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죠. 저는 제 아이를 공립학교로 보냈고 언니는 스쿨버스를 타야 하는 신촌의 한 사립학교에 보냈습니다.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조카의 학교 생활을 돌아봅니다.


비싼 학비를 내면서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냈던 가장 큰 이유는 교육의 질입니다. 한 반에 30명을 넘지 않는 학습 환경, 학부모와 학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뛰어난 교사, 부모들 사이에 넘치는 교육 정보. 오리엔테이션과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온 언니는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하지만 입학해서 한 달도 지나지 않았을 때, 학교에는 수영대회 공고가 붙었습니다. 수영과 스케이트를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이 안되기 때문에 입학과 동시에 일주일에 한 번 수영장을 다니기는 했지만 겨우 한 달이 지나 '대회'라니요?

엄마들은 부랴부랴 아이들에게 개인 강습을 붙였습니다. 제 조카 경실이도 매우 비싼 수강료를 내면서 개인강습을 받았지만 워낙 운동신경이 없는 여학생인지라 수영대회는 결국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대회날, 경실이는 우두커니 앉아 친구들의 수영솜씨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지요.

한 달이 지나자 이번엔 성악대회가 있었습니다. 경실이와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그룹을 지어 성악 과외 교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대회에 나온 어린이들은 한결같이 텔레비전 동요대회에 나온 어린이들처럼 세련되게 노래를 부르더군요. 이번엔 경실이도 대회에 나갔지만 상은 타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붙은 공고는 피아노 경시대회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피아노를 전공한 경실이의 사촌언니가 두 시간씩 붙어 앉아 경실이를 집중 연습시켰습니다. 체르니 100번을 치는 경실이는 훈련(?) 결과 예선에 합격했고 다시 일주일간 피나는 훈련 끝에 본선에선 우수상을 받는 개가를 올렸지요(체르니 30번을 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데 체르니 100번을 치는 아이가 수상을 했다고 엄마들이 수군거리더랍니다).


이번 달에는 영어동화 구연대회가 있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심사위원들이 가장 많이 보는 것은 바로 발음이랍니다. 완벽한 발음을 위해 언니와 다른 학부모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지요. 이제 조금 있으면 스케이트 대회가 또 열린다고 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피아노는 잘 치지만 운동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경실이는 아마 또 개인강습을 받아야 할 겁니다.

한 달이 멀다하고 이어지는 각종 경시대회. 한 학급 30명 중, 절반 이상의 어린이가 그 모든 대회에 다 참가한다고 합니다. 경시대회가 있는 날이면 학교를 하루 빠져도 용인해준다고 하네요. 그 시간 동안 연습을 하라는 선생님의 배려지요.


아이들은 경시대회 일정에 맞추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교육받고 훈련하며 대회에 출전하고 또 상을 받습니다. 경시대회 인생이라고나 할까요?

사립학교를 졸업하면 흔히 아이들이 공부뿐 아니라 예체능에 뛰어난 팔방미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싼 학비를 내며 멀리 스쿨버스를 태워가면서 학교를 보내는 거지요. 하지만 알고 보니 학교는 경시대회 일정표를 짜는 것 외에 별로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입학한 지 한 달, 한 학기 동안 학교에서 배운 게 뭐가 있다고 경시대회에 나갈 실력이 되겠습니까? 결국 언니처럼 개인강습, 즉 사교육의 승리인 거죠.

언니는 자조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공립학교에선 뭘 해줘야 될지 몰라 엄마들이 우왕좌왕한다면, 사립학교는 학교에서 경시대회라는 틀을 제시해줘서 그에 맞게 교육만 시켜주면 되니 길 안내 하나는 훌륭하게 하는 셈이라구요. 비싼 학비는 바로 그에 대한 대가라나요?

참, 경실이네 학교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모범 어린이상'을 줍니다. 이 상을 받으면 일년 내내 모범 어린이 배지를 교복에 달고 다닙니다. 경실이는 입학해서 두 달동안 이 배지를 받지 못해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마침내 세 달째, 경실이는 자랑스러운 모범 어린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모범 어린이 상을 받지 못한 많은 다른 아이들의 엄마는 속병이 다 날 지경이라고 합니다. <나쁜 어린이 표>라는 동화책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윤흥길의 <완장>이라는 소설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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