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아체운동' 목숨 건 활동가들

인도네시아 아체 방문기 (4)

등록 2001.10.10 16:12수정 2001.10.11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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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6일 정오 나는 반다아체 시내에 있는 한 영어학원 입구에 서 있었다. 전날 만나기로 했던 한 학원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의 오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순찰을 돌던 인도네시아 군인 4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내게 신분증을 보여달라며 인도네시아 말로 뭐라고 뭐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눈치챘지만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했다. 그들은 내게 시내는 위험하니 숙소로 돌아가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한 것이고 나는 그 말을 무시한 것이다.


이때 학원에서 오전 수업을 마친 그 학원강사와 학생들이 문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나를 모르는 척하며 군인들과 나 사이의 통역을 해주었다. 군인들이 돌아간 후 그는 내게 두 가지 말을 했다.

첫째는 누구에게든지 '자신'을 안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저널리스트'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매우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나보고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찾아오겠다고 해놓고서는 결국 전날에 이어 이날도 오지 않았다.

그는 반다아체에 있는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후 현재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나 것은 내가 반다아체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인 9월 4일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다. 9월 4일 오전 나는 시내를 걷다가 영어학원을 발견했는데 날짜가 지난 영자신문을 얻어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그를 만난 것이다.

그는 내게 아체에 온 이유를 물었고 나는 그에게 자유아체운동(GAM) 캠프를 방문하고 싶은데 혹시 도와줄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루종일 함께 다니며 자유아체운동(GAM) 캠프를 방문할 길을 찾았다.


그는 자기 친구 몇몇이 자유아체운동(GAM)과 연계를 맺고 있다면서 그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날 그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반다아체 곳곳을 누볐다. 물론 나는 조금이라도 외국인이라는 티를 덜 내기 위해 옷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차려 입었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그의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저녁 때 그는 나를 그의 집에 내려놓고서는 어딘가에 다녀왔다. 그리고서는 하는 말이 아무래도 당분간은 자유아체운동(GAM) 캠프 방문은 물론이고 관련자들을 만나는 것조차 힘들겠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인즉슨 '메가와티 대통령이 아체 방문이 예정돼 있어 인도네시아 군경의 통제가 더욱 심해지고 있고, 9월 2일 있었던 자유아체운동(GAM)의 반다아체 내 인도네시아 군 캠프에 대한 기습작전 때문에 많은 자유아체운동(GAM) 관련자들이 밀림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자유아체운동(GAM) 캠프까지 안내해줄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겠다고 해놓고서는 며칠 동안 나를 숙소에서 기다리게 했다.

나는 그를 기다리다 못해 한번은 영어학원으로 찾아갔고 한번은 그가 일하는 다른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는 영어학원으로 찾아갔을 때는 숙소에 가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결국 오지 않았고 사무실로 찾아 갔을 때는 시간이 없다면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해놓고서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나를 돕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쩐 일인지 점점 약해졌던 것 같다. 비록 그로 인해 며칠을 허송세월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의 몇차례 만남을 통해서 아체의 현실을 좀더 깊이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런 그가 목숨을 걸고 나를 돕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아체의 독립을 원하고 자유아체운동(GAM)을 지지하지만 앞에 나서지는 못하는 평범한 시민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그의 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했을 때도 극구 거절하다가 겨우 허락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필름을 인도네시아 군경에게 빼앗기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그가 그런 것은 겁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아체인들이 얼마나 인도네시아 군경의 테러 위협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좋은 증거다. 그의 처삼촌은 두 달 전에 자유아체운동(GAM) 활동가라고 오인받아 인도네시아 군으로부터 살해당했다.

나는 그에게 도움 받기를 포기한 이후 아체 지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여러 명의 또 다른 '그'를 만났다. 그들은 나를 돕고 싶어하면서도 나를 돕지 못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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