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세상 속에 교회를 처음으로 탄생시킨 것은 성령 활동의 눈부신 결과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을 위한 여백을 남겨두지 않은 채, 자기완결 구조 속에 함몰되어 세속의 논리를 고스란히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말았다. 즉 저자가 '이 세상의 수단들'이라고 지적하듯이 "교리, 직위, 제의, 의식, 권리, 율법, 위계질서, 관료주의, 금융자본"이 오늘의 교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을 가로막는 병든 교회의 현재 모습이다.
이상한 일이다. 신학이 정교하게 발달할수록, 교회가 비대해져 갈수록 성령의 활동은 자꾸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이건 단지 교회가 눈이 어두워서 잘 보지 못하였을 뿐이다. 교회가 "성령 망각증", "성령의 무풍지대"에 똬리를 틀고 있을 때, 성령은 자유롭게 교회를 넘어서 세계 이곳 저곳에서 활동하고 계셨던 것이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나 영은 살린다"(고후3:6)는 말씀처럼 성령은 신학적인 교리와 경직된 교회에 매어 있지 않고 바람처럼 물처럼 살리는 영으로 메마르고 억눌린 곳들을 두루 적시며 생명의 숨을 한껏 불어 넣으시는 분이시다.
이 책은 독일에서 유명한 개신교 저술가인 하인츠 차른트가 1991년 루르 지방의 독일 교회의 날 행사에서 강연한 내용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독일에서 나온 신학관련 책이라면 흔히 만연체의 딱딱함과 지루함을 연상하기 일쑤인데, 이 책은 그러한 우리네 선입견을 간단히 뒤집고 있다. 문고판으로 출간되어 워낙 분량 자체가 얼마 되지 않는 데다가 내용 또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쓰여 있다.
그러면서도 니고데모, 모세,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 수가성 우물가 여인 이야기 등 성경에 나오는 구체적인 실례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성령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이야기에서 저자는 이성적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와 황홀경(ecstasy)과 도취(intoxication)의 차이, 믿음과 성령을 통한 치유에 관해, 성령과 에큐메니칼 운동 등 매우 다양하고 중요한 주제들을 이끌어 내어 알기 쉽게 이야기해 준다.
사실 성령은 교회 내에서 많은 오해와 억측, 때로는 강요 하에서 뒤틀린 상태로 알려져 있는 걸 종종 본다. 그래서 소위 성령운동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령을 마치 자신의 통제 아래 마음껏 나눠줄 수 있는 은사나 되는 양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고, 성령의 역사는 성서 시대로 종말을 고하기라도 한 듯이 성령운동 자체에 대해 냉소로 일관하는 사람들도 많다.
저자는 성령을 망각하고서 잠들어 있는 교회를 뒤흔들어 깨우기라도 하려는 듯 성서에 나타난 성령 사건을 기초로 오늘의 교회에 진지한 반성과 변화를 촉구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올바른 성령 이해를 위한 논제들을 잊지 않고 잘 제시해주고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제사장적-제도적 형태의 종교와 예언자적-카리스마적 저항운동 사이의 풀리지 않는 긴장 관계는 세계 모든 종교의 영원한 문제"라고 전제하면서, 그 자체는 회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것을 우상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내세워 어떤 책이나 교리, 제도, 특정 인물, 성례전, 직위, 제단이라는 틀에 고착시키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한은 무한을 결코 움켜쥘 수 없으며 제사장적-제도적 흐름과 예언자적-카리스마적 흐름은 영구적인 갈등 관계에 있으면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부턴가 신앙의 타오르는 열심을 상실하고 메말라 있는 분들, 하나님의 영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시도하고자 하는 분들, 교리와 신학적 논쟁에 식상한 분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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