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갠 뒤 '산정'에 올라가 보셨나요

<길 위에서 쓰는 편지> 잠시 세상의 일을 잊고 지낼 수 있었습니다

등록 2001.10.30 11:07수정 2001.10.3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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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라는 말을 자꾸 되뇌이다 보면 오곡의 풍성함과 솔잎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낙엽과 함께 성큼 내게로 다가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더 가까이 이런 계절을 느끼고 싶어 마음 졸이며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이 유독 많은 계절이다. 길 떠남이 직업이 된 필자도 이런 가을은 벌써 여러 곳을 점찍어두고 즐거운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렇듯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고민이 생겨났다.

이 글을 보고 또 사람들이 자꾸 찾아들어 망가지면 또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연의 것은 자연 그대로 두고자 노력하는데 쓸데없이 자연을 탐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제집 안방으로 혹은 마당으로 자꾸 옮겨 가려고 안달을 한다.

어디 이 산하가 그런 자연을 일구고 사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었는가? 자본과 권력에 집착하는 모리배 몇몇에게 신음하고 있는 것이지라고 자위하며 또 한 길을 얘기한다.

▲구름속의 일출. 두터운 구름을 뜷고 해가 솟았습니다. 그 쏟아졌던 장대비는 언제의 일인지 아득하기만 했고, 두루 평안하게 세상을 감싸주는 빛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 전고필

나는 지난 주말 아주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며 지리산의 한 길을 택했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어서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내 배낭에 반드시 고무신 한 켤레가 자리잡고 있어야 했다. 땅을 내딛을 때 느껴지는 대지의 청순함이 콘크리트에 길들여진 발을 타고 다리를 지나 심장을 거쳐 머리까지 전달될 때, 나는 야릇한 쾌감을 그 길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비는 쉴새없이 쏟아졌지만 후배와 나는 두시간 반 동안 헉헉거리며, 남겨두고온 세상에 대한 조소와 살아갈 날들에 대한 얘기로 체력을 북돋아 정해진 코스에 올랐다.

▲풍덩 몸을 던지고 싶은 섬. 내가 있는 산은 망망 대해의 바다와 같았습니다. 저 구름의 바다위에 한발을 딛고 다른 발로 그 앞을 가로질러 아득한 곳에 있다는 몽유의 세계를 찾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 전고필

거의 다 닿을 무렵에는 산토끼 한 마리가 내 헤드랜턴의 빛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조응을 했다. 십여년 전 군대의 야간 매복 작전이 있었던 비 오는 날 참나무 아래 웅크리고 꼼짝하지 않던 토끼를 잡았던 기억이 등반하면서 떠올렸는데 이렇게 또 영감이 적중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녀석이 뛰어가는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목적지 산장에 여장을 풀고 샘에서 비를 훔쳐내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산정의 소리를 모아 보았다.

구상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 양철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파열음을 내고 고속 질주하는 어떤 성급한 바람소리, 비를 피하려 재잘대며 처마 밑으로 다가오는 딱새의 울음소리, 그런 소리에 자꾸만 귀를 모으다 잠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버질과 에이미였다. 쉼이 필요한 역량 있는 건축설계사인 뉴욕커 에이미란 여인이 주변의 강권에 떠밀려 온천 휴양지의 한 호텔에 투숙하면서 만난 버질이란 눈이 보이지 않는 안마사와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다.

한 살 때부터 세상이 보이지 않았던 버질이지만, 보이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쓸데없는 탐욕에 집착하는 세간 사람과 달리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로 비가 내리는 양이나 시간을 예측하고, 벽을 흘러내리는 소리로 공간의 부피를 가늠하고, 몸으로 느끼는 감촉과 냄새 등으로 주변의 모습을 재구성하는 그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는 멋진 남자와의 사랑 얘기를 그린 "사랑이 머무는 풍경"이라는 영화였다.

얼마 전부터 컴퓨터에만 앉으면 다가오는 어깨의 통증과 오른쪽 머리의 지끈거림이 산정에서 풀어지면서 머릿 속에 남아 있던 버질의 비어있음으로 순수했던 감성에 대한 부러움이 꿈을 불러들인 모양이다.

▲구름이 돌아 간 자리. 불타는 산하의 붉은 기운이 천천히 수줍은듯 몸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나는 꿈길 속에 있었습니다. 싸리나무가 얼굴을 스칠때 그때 눈을 떠 보니 산은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 전고필

꿈에서 깨어 산장 밖을 나서보니 비는 그치고 주변의 산들은 구름에 얼굴만 내밀고 마치 징검다리가 되어 있었다. 종일 비가 내리리라고 생각했는데 예기치 않은 아침이 시작된 것이다. 구례 시가지를 휘도는 구름이 섬진강을 타고 백운산을 덮고, 천왕봉쪽에서 오는 구름이 피아골쪽에서 서로 만나 엉켜 붙는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나는 또 길섶에서 잠에 취했다.

문득 세찬 바람이 싸리나무를 흔들어 내 얼굴을 스칠 때 잠에서 깨어 보니 구름은 내 머리 위에 놀고 있고 산골짜기에는 불타는 산하만이 남아 있었다.

가을의 사랑이 이 골짜기에 가득했다. 내려가자는 후배의 말을 들으니 잊었던 어깨의 통증이 시작됐다. 나는 세상을 붙잡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닌데 왜 그 세상에 휩싸여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바둥거려야 할 것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아침 햇발속의 세상. 태양 아래서 모든 존재는 태양의 빛을 닮아 가나 봅니다. 연구실의 좁은 공간을 벗어나지 못해 창백하던 후배의 얼굴에 홍조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런 충만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전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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