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주능 종주기(4)

대성골을 바라보니 아픈 역사가 밀려온다

등록 2001.11.06 07:32수정 2001.11.0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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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잠을 청한 탓으로 늦게 일어나 짐을 챙겨 놓고 산장에서 구입한 꽁치 통조림(5000원)을 넣고 찌개를 끓였다.(07:00) 산행 중 만난 동행자와 함께 식사를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장터목을 향해 출발했다.(09:00) 어제 밤 욱신거리던 다리도 가뿐하고 컨디션이 좋아 휘파람이 절로 난다.

삼각고지를 지나 형제봉으로 향하는 길은 완만한 오르내림의 연속이었고 곳곳에 아름드리 고사목이 길을 막고 드러누워 있다. 낙엽진 능선 길은 겨울을 재촉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좌우로 펼쳐진 준령들이 장대하다. 주능선의 저무는 가을 풍경에 카메라 앵글을 맞추면서 좋은 장면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써 본다. 형제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동족끼리 총구를 맞대고 처절하게 싸웠던 상념에 대성골을 바라보니 아픈 역사가 밀려온다.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고 이념이 무엇인지....


지난해 빨치산과 토벌대간 격전으로 숨져간 한 고인의 미망인을 만나 민원을 처리하면서 지리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비극의 현장을 훑어보고픈 마음이 자리하게 되었다. 50년 넘게 한을 품고 살아온 미망인은 지금도 노구를 이끌고 지리산 어느 암자를 찾아 비명에 숨져간 남편의 영혼을 달래고 있다. 해방 후 역사의 격랑 속에 휘말려 한 맺힌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면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감싸 안아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굽은 능선 허리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벽소령 산장에 도착했다.(11:00) 뒤편 언덕에 올라 주변 경관을 카메라에 담고 50미터 아래에 있는 샘터에서 식수를 채웠다. 벽소령 산장은 최근에 지어진 신축 건물로 2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데 내부는 목재로 잘 치장되어 있다. 숲과 고사목 사이로 떠오르는 벽소령 명월을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며 지리 10경 중 하나로 꼽고 있는데 한 낮이라 명월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걸음을 옮겼다.(11:40)

벽소령산장 옆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탄하게 이어지고 조망도 뛰어나다. 마지막 남은 때깔 좋은 단풍은 호젓한 가을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하다. 주능선 종주 길 중에서 산행하기에 가장 편안하고 운치 있던 구간으로 기억된다. 30여분간의 편안한 길을 지나 완만한 비탈길을 올라 덕평봉을 돌아가니 넓은 개활지가 나타난다.(12:35) 돌담 사이에서 샘물이 쏟아지는데 물맛이 좋고 수량도 풍부하다.

식사 준비를 하고 있으니 어제 연하천 산장에서 숙박을 같이 했던 낯익은 분들이 터를 잡고 앉는다. 물을 받는 것을 보고 선비님에게 인사를 하고 물을 뜨라고 하니 무슨 사연이 있냐고 묻는다. "옛날 아랫마을에 이씨 노인이 천박하게 살면서 평생 한번 선비 대접을 받는 게 소원이었는데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샘터 위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하여 이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선비샘의 유래를 설명하자 "선비님 고맙습니다"며 합장을 한다. 모두 한바탕 웃고 점심 식사를 맛있게 했다. 주변을 둘러 봐도 무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칠선봉을 향하는 길은 된비알의 너덜지대로 힘들었던 구간이다. 25분을 쉼 없이 오르니 해발 1576미터의 칠선봉이 나타난다.(14:15) 멀리 천왕봉이 솟아 있고 장터목산장이 눈에 들어온다. 평탄한 능선과 오르내림을 거듭하다가 전망 좋은 이름 모를 암두가 나타난다. 돌아보니 반야봉이 우아한 자태로 솟아 있고 연봉들이 부드럽게 선을 그리며 겹겹이 쌓여 있다.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고 푸근하다 하여 지리산을 여성적이라 하는가?


영신봉을 지나니 넓은 세석평전이 펼쳐지고 있다(15:35). 세석산장에 근무하는 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시간상으로 장터목까지 충분히 갈 수 있다며 산장 운영과 등산 코스까지도 상세하게 알려 준다. 빠른 걸음으로 10분 여를 오르니 촛대봉에 도달했다. 천왕봉이 가까이 다가오고 주변은 막힘이 없다. 해지기 전에 장터목에 도착해야 겠다는 조급한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내리막이 계속되다가 삼신봉을 향해 된비알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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