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내라는 이름으로 집을 나왔다

등록 2001.11.17 01:37수정 2001.11.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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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인희 씨는 가출을 했다.


올해 33살의 인희 씨.
유아영어교사로 나름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영어전문 서점에서 강의를 4개나 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오라는 데가 많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

5세 된 딸과 돌쟁이 딸을 키우고 있는 인희 씨는 육아의 부담을 친정 근처로 이사하는 걸로 덜었지만 사실 남편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다.

연애시절 담배 피우는 것도 모르게 할 정도로 항상 먼저 생각하는 남편의 배려에 감격해서 결혼을 결심한 인희 씨. 고등학교 과학 교사로 재직 중인 남편은 직업답게 매사 합리적이고 원칙을 고수한다. 결혼 생활도 육아문제도... 지극히 합리적인 문제로 인식한다.

몸이 으실으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수업준비도 못하고 누워버린 인희 씨. 유아영어의 특성 상 1시간 수업에 기본적인 수업준비가 4~5시간은 걸린다.

교구 만들고 내용에 따라 노래 찾고 율동연구하고 다시 정리하고...
4개의 강의를 하려면 하루 건너 한 번씩은 수업준비로 시간이 필요한 인희 씨, 감기 기운에 맥을 못추고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딸아이 젖병도 안닦아 놨는데... 걱정만 할 뿐 몸이 움직이지 않아 속상하던 차에 남편이 퇴근했다. 딸아이 돌보기와 젖병 씻는 것을 부탁하고는 잠이 들려는데 남편이 피곤하다며 잠시 앉았다 하겠다더니 아예 누워버린다.

딸아이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울음소리가 커지는데도 꼼짝을 안하고 누워만 있는 남편. 참다 못한 인희 씨가 다시 부탁을 하자 "알았어~할거야~" 하더니 도통 일어날 기미가 안보인다.
열에 들뜬 몸을 간신히 일으켜 딸아이를 달래고 젖병을 씻어서 우유를 먹이고 나니 갑자기 눈물이 난다.


힘든데... 나 정말 힘이 드는데 저 사람은 알기나 할까? 내가 왜 힘들어 하면서도 과외를 하고 다니는지 저 사람은 알기나 할까? 친정 엄마에게 아이를 둘이나 맡기면서도 수고비 한 번 변변히 못드려서 속상해 하는 걸 저 사람은 알기나 할까?

나 결혼 시키느라 엄마, 아빠 여유 없이 사시는 걸 저 사람은 알기나 할까? 남들은 교사 부인이라고 부러워 하지만 정작 나는 너무 힘들게 살고 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알고 있을까? 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누워만 있는 저 남자가 내 남편인가?'하는 생각이 들자 인희 씨는 그냥 집을 나와버렸다.

어디로 갈까?
갈만한 곳도 없다.
그냥 나만의 시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뿐...
벨소리...
집에 얼른 들어오라는 남편의 전화다.
"미안해."

늘 이런 식이다.
담배 피우는 걸 들켰을 때도, 연애시절의 배려가 함께 하기 위한 일시적인 노력이란 걸 알았을 때도, 번번히 늦는 남편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도, 일상의 소소한 거짓말로 이혼을 생각할 때도 남편은 말했다.
"미안해."

.

.

.
오늘도 남편은 말한다.
"미안해."

"나한테 1시간도 허락이 안돼? 들어갈거야. 조금만 있다가~."
결혼이라는 게 여자에게 보이지 않는 굴레가 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 인희 씨. 참을 수 없는 순간마다 이혼을 결심하면 도대체 몇 번을 이혼하고 살까?

갈 곳이 없다. 하소연 할만한 사람도 없다.
도대체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이런 얘길 할 수 있을까?
인희 씨는 다시 발길을 돌린다.

'딸아이는 잠이 깼을까?...'

덧붙이는 글 | 함께 살면서도 남 같이 느껴질 때가 있는 남편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함께 살면서도 남 같이 느껴질 때가 있는 남편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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