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초소에서 난 한마리 곰이었다"

등록 2001.11.20 16:40수정 2001.11.2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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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쯤이면 일기예보에 항상 오르내리는 곳이 있다. '올해 기상관측상 가장 추운 기온을 기록한' 곳으로, '가장 먼저 월동 준비를 하는' 곳으로 자주 TV에 보도되는 곳, 화악산 공군 방공포 부대가 바로 그 곳일 것이다.


한 겨울에 접어들면 꼭 한 번쯤은 군인들의 겨울나기 프로 같은 것을 방송하는데 여기서도 빠지지 않는 곳이라면 우리나라 산악 각지에 자리잡은 이런 방공포 부대들일 것이다. 오늘 일기예보에서도 이 곳의 매서운 겨울 추위는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그 차가운 입김을 내뿜었다.

이런 방송을 접할 때마다 나는 악몽과도 같았던 그래서 아직도 가슴 먹먹하게 아스라한 나의 군대생활을 떠올린다. 군생활도 지나고 나면 모두 추억이라고 말하지만 아마도 그건 망각에서 오는 기억 저편의 시간으로 남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굳이 그 시절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가끔 그때 그곳을 떠올리면서 친구들과 술잔을 거하게 기울이면서 그 시절을 호사롭게 얘기 나누기도 하지만 말이다.

군대... 겨울이면 날 몸서리치게 하는 곳

군대는 아마도 이 땅의 모든 남자들의 술안주 거리일 것이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나에게도 이렇게 싫든 좋든 지울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곳은 전라남도 벌교의 존제산 방공포 부대였다.


내가 지금 그 곳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오늘 일기예보 시간에 보여줬던 부대가 너무나 살갑게 다가와 도저히 그 때의 기억을 억누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내 앞에는 말년에 어렵게 찍은 몇 장의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 그 곳은 전라남도 벌교라는 '주먹으로 유명한',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 무대이기도 했던 남도의 작은 읍에 위치한 존제산 꼭대기이다.


따뜻한 남도에 위치한 이 곳이 추워봐야 얼마나 춥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지리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백두대간은 바다를 눈앞에 두고 바로 이 곳 존제산에서 멈춰 서 있기 때문에 겨울이면 겹겹이 펼쳐진 내륙 산하로부터 불어오는 칼바람에 살이 말 그대로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 군대인들 안 추운 곳이 있겠냐마는 방패막이도 없는 산 정산의 부대의 겨울은 정말이지 동장군도 콧물 찔끔하고 갈 정도로 추웠다.

한 가치 담배와 이등병의 편지

그 곳 생활에서도 가장 고생스러웠던 것이라면 단연 새벽에 초소 근무를 나갔던 일이다. 새벽의 내무실 안은 걸어놓은 빨래를 단번에 말릴 정도로 뜨거운 증기를 내뿜던 스팀이 '취익시익' 소리를 내며 열을 더하곤 했다. 수많은 꿈들이 탈영을 감행하던 그 시간에도 불침번은 어김없이 손전등을 들고 다음 근무자를 깨우러 왔다.

스쳐 가는 손전등 불빛에도 근무시간임을 직감하고 벌떡 일어나 선임병을 먼저 깨운 나는 그 많은 동계피복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아니 입는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그 옷들을 온몸에 둘러싸고 나면 나는 한 마리의 곰이 되어버리곤 했다. 그렇게 입은 옷은 좀더 따뜻한 근무를 서기 위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입고도 초소에서 서 있길 한 시간이 지나면 나는 추위 앞에 무장해제 되어버리곤 했다. 그럴 땐 고참에게서 받던 얼차려와 승단을 위해 익히던 태권도 품새는 그 추위를 조금이나마 참을 수 있게 했다.

근무 인원이 모자라 혼자 초소에 섰을 때는 살포시 타이어 방벽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왜 그렇게 회한(?)이 몰려오던지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이등병의 편지'가 3절까지 흘러나왔다.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또 웬 별들이 그렇게나 많든지 그 수많은 별들과 총총히 눈을 맞추고 있으면 새까만 하늘에서 '휙'하고 떨어지는 별똥별을 참 많이 보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일까. 난 초소에서 담배 피다가, 졸다가, 신문 보다가, 라디오 듣다가 순찰 돌던 당직 하사에게 자주 들켜 군기교육대까지 갔다와야만 했다. 이렇게 한편으론 문제 사병이기도 하였던 나는 공을 잘 찬다는 이유로 그래도 부대에서 사랑 받는 사병이기도 했다. 한 가지만 잘하면 되던 군대는 참으로 단순한 곳이었지 아마.

그 시절 그렇게 춥던 추위도 이제는 다 기억으로만 남고,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는 이제 넘쳐나서 나태한 모습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그래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끝끝내 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항상 내 기억의 언저리를 배회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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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꿈을 해몽한다" 작가 김훈은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언어의 순결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을 "말은 질펀하게 넘쳐났고 삶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은 웃자란 말들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불어갔다"고 부끄럽게 회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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