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과 진실의 이름으로 ①

정보동의 김홍만 선생께

등록 2001.11.27 14:51수정 2001.11.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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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만 님, 안녕하신지요.


우선 님께서 거의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계시는 저의 '잡사' 소개부터 다시 하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요소 요소에서 잡사를 곁들여 버무리는 일도 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제 생활 속의 잡사 하나 하나가 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제 잡사를 소개하는 일이 때로는 비중 있는 화두가 되기도 하니까요.

이 말은 제가 그만큼 내 하루하루의 삶을, 그리고 생활 속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들'을 진실하고 진지하고 올바르게 가져가기 위해 나름껏 노력한다는 뜻으로도 되겠습니다.

지난 23일 아침에 「이름을 감췄던 내 비겁함을 고백하며」'한 시절 천재 작가의 곡학아세를 장송하며'를 인터넷 세상에 올리고 나서 출타를 했더랬습니다. 제 어머니의 약을 타러 대전성모병원에 갔던 거지요. 아실 지 모르겠습니다만, 올해 78세이신 제 노모께서 지난 9월 25일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10월 8일 퇴원을 하셨거든요.

다시 한 달 분의 약을 탄 다음 대전 둔산동에서 사는 막내 동생네 집으로 갔지요. 노모께서 또 한바탕 공사를 해서 차에 실어주신 세 가지 김장 김치통들을 내려 주고, 그날 밤은 동생 집에 머물면서 인터넷 세상을 유영했지요. 덕분에 그날의 내 글로 인해 특히 '정보동'에서 크게 토론이 벌어진 것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김홍만 님의 예리하면서도 방만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그 토론을 다음날 집에 돌아와서도 지켜보면서 나는 마음이 많이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가운데서도 김홍만 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어떤 형태건 간에 문제 제기는 모두에게 환기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주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나 대신 방패와 창을 동시에 쥐고 분투하시는 박 무 님께는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 한량없었습니다.

박 무 님의 논법들을 읽으면서는 애처로움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살 수밖에 없는 민초의 속성 같은 것이 이슬처럼 그의 글들에서 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애써 교신을 시도하는 듯한, 또는 난시청 지역에서 채널을 맞추기 위해 전자기기와 씨름하는 듯한 ―그런 형태와도 같은 처연하고도 안타까운 모습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몹시 우울하면서도 슬펐습니다. 나 자신도 슬프고, 박 무 님도 슬프고, 김홍만 선생님도 슬픈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슬픈 존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슬픈 시절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시대의 이 특별한 슬픔부터, 그 슬픔에 대한 인식부터 새롭게 가다듬어야 할 필요성도 나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지금도 여전히 한밤중에 산길을 헤매는 나그네임을 자각하곤 합니다. 한밤중에 산 속을 헤매는 상황이니 나그네의 길은 외롭고도 험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그네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하고 허당도 많은 길을 그래도 용케 헤치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저 멀리에서 깜박이는 불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빛을 바라고, 한사코 그 불빛을 향해 나그네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나그네인 나에게는, 옛날 청년 시절부터 깊은 한밤중의 산 속에서도 내 걸음을 인도해 주던, 저 멀리에서 깜박이는 등불이 분명히 존재했었고, 그 등불은 장년의 세월을 살고 있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불빛을 향해 걸음을 애써 내디디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걸음을 인도해 주는 그 불빛은 내가 추구하는 진실과 옳음일 수도 있고, 진정한 가치관일 수도 있으며, 그냥 내 신념이나 희망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더욱 확대해서 내 삶의 전체를 관장해 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나는 내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그 불빛을 향해, 그 불빛으로 말미암아 오늘까지 살아왔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내가 진실과 양심의 이름으로 추구할 수 있는 등불이 있었기에, 저 엄혹했던 유신 시절과 5공 치하에서도 그 불빛을 따라 신념을 세우고 꿋꿋이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내 비록 학력이 일천하므로, 그리고 시골에서 살고 있는 핑계로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 속에서 전개되었던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투쟁의 대열에는 매번 같이 나서지도 앞장을 서지도 못하였지만, 그래서 더더욱 우리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들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며 존경할 줄은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그때나 지금이나 멀리에서 깜박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확실한 신념의 불빛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 현대사의 맥락을 짚어보며 우리가 기필코 나아가야 할 길을 통찰의 눈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나는 여전히 외롭고도 고달픈 나그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도 나는 나그네가 되어 한밤중의 산길을 헤매는 기분입니다. 내 걸음을 압제하고 제약하려는 가시덤불 같은 것들이 내 앞길에, 우리 앞에 너무도 무성함을 절감합니다. 그런 절감 속에서 나 자신은 물론이고, 박 무 님의 존재도 안쓰럽게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대전에서 돌아온 날, 즉 토요일 오후에도 잠시 컴퓨터 앞에 앉아보았습니다만, 좀처럼 글의 갈피가 잡히지 않았고, 또 '한국통신'의 태안 지역 인터넷 서버도 고장이고 해서 나는 다시 마음을 간종이며 백화산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도 팔자 좋게 거의 매일같이 오후 4시 무렵에는 우리 고장의 명산인 백화산을 오른다는 것을 김 선생님은 아시는지요? 얼마 전에 「산을 오르며 기도를 하며」라는 글을 정보동에도 올렸기 때문에 참고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김홍만 선생께서 그 글을 읽으셨다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나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하여 거의 매일같이 성경을 접하고 읽으며 사는 내게 "시간을 내어 성경책을 '제대로'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라는 말이며, "그리고 '용서나 관용'이 무엇인지를 숙고하여 보시기를 권합니다."라는 말은 차마 하시지 못했을 것 같고….

물론 조선일보를 비롯한 족벌 언론들을 두둔하고, 이문열 씨와 박완서 선생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김 선생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지 않습니다. 김 선생의 속성이나 또는 어떤 한계 속에서 내가 조망되고 파악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나로서는 김 선생의 글에서 "바라건대 이 세상에 대한 짜증스러운 눈길을 거두어들이기를 권하는 바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말을 그대로 김 선생께 되돌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김 선생의 그런 문맥에서 필요 이상의 '짜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여튼 우리는 '짜증' 따위 소소한 감정의 눈으로 사안을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부터 '짜증' 따위는 너끈히 초월하는 차원에서 내 얘기를 전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백화산 얘기를 꺼내고 보니 또 불현듯 생각나는 것이 있군요. 김 선생께는 또 한번 뜨악한 '잡사'이겠습니다만, 나로서는 소중한 추억이고 좋은 얘기 감입니다. 5공의 한창 시절이었지요.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의 서산·태안 지구당의 사회부장인가 청년부장인가를 맡고 있던 후배가 있었지요. 민정당원으로서 누구보다도 열성적이었던 친구였습니다.

같은 천주교 신자인 것이 인연이 되어, 즉 서산천주교회의 청년회장이 된 이 친구가 서산지구 청년연합회를 조직하면서 나를 그 지구연합회의 고문으로 추대하면서 알게 된 사이인데, 나는 처음부터 이 친구가 민정당 지구당의 핵심당원이라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는 광주시민 학살정권, 민주주의를 도륙한 피묻은 군홧발 정권에 불과한 5공 정권의 말단 하수인이 천주교 청년회 지구연합회장을 맡고 있다는 게 영 마땅치 않게 보였던 것이지요.

그를 민정당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슬슬 대화를 시작했지요. 자주 술잔을 함께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백화산까지 같이 올라가서 대화를 계속했지요. 그는 결국 내 지론과 신념에 승복을 하고, 과감히 민정당 지구당의 당직을 버렸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시절을 즐겁게 추억하곤 합니다. 자신을 변화시킨(의식화시킨) 사람은 아무개 형님이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그는 그 후 시민운동가로 변신해서 지역의 이름 있는 일꾼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 경험으로 볼 때, 지금의 이런 대화에는 서로의 진짜 육성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참 아쉽습니다. 나도 김 선생도 이런 글 나부랭이를 집어치우고 직접 만나서 얼굴 마주보며 술잔과 함께 육성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해 접근이 훨씬 용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체취 속에서 인간미를 탐색하며 거나하게 취기를 나누다보면 어깨동무하고 함께 백화산에도 오를 수가 있겠지요.

아무튼 그런 희망도 가져보면서, 별로 효험 가치가 없을 듯한 이 필설을 계속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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