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가 낳은 시인 타골('타고르'로 더 알려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나, 내게 루미(1207~1273)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이 사람에 대한 소개를 보니, 그는 아프카니스탄 태생으로 신비주의적인 신학자이며 천재적 시인, 이슬람 세계의 사상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더 '아프카니스탄' 출신이라는 게 눈에 띈다. 가난과 내전으로 점철된 나라, 아직까지 세계 최대강국이라는 미국과 거의 일방적인 전쟁을 한 판 치르고 있는 나라에 이처럼 뛰어난 시인이 있었다니!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이 시집은 서구 문화에 경도된 우리의 시야를 다시 동방으로 되돌리려는 작은 시도처럼 보였다. 가까이에 뛰어난 시인과 사상가들이 즐비하게 오랜 세월 존재했는데도, 우린 그 동안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루미의 사랑에 관한 신비주의적 시들은 그 내용이 아무리 연인들 사이의 사랑 노래처럼 묘사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간절하게 신을 그리는 인간을 말하고 있음은 눈치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 수 있다. 수도자의 신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랄까 바로 그런 싯귀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예를들면, 다음과 같다.
갈 망
당신을 갈망합니다.
먹는 것보다 마시는 것보다
더욱 목마르게
내 몸과
감각과
마음이
당신의 맛에 주려 있습니다....
그가 비록 이슬람교도였음에도 이는 성서 <시편>의 노래들과 매우 흡사하다. 내용 또한 현대적인 시편이라고 할만큼 훌륭하다. 하지만 성서 시편이 그렇듯, 그의 이 시들은 수도자나 신비한 신(神) 체험을 한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든다. 그러나 어차피 신에 대한 간절한 인간의 열망과 추구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사에서 생겨나는 것인 만큼 누구든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타고르의 <죽음 노래>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혹자는 죽음을 노래한다는 것은 음산하고 불쾌하기까지 할지 모른다. 하지만, 노년이 아닌 젊은 날에 이미 죽음을 성찰해 보는 것은 그만큼 삶에 대해 더욱 성실하고 진지해지겠다는 것이리라. 공자는 사후세계를 묻는 제자에게 "삶의 문제도 다 모르는 데 죽음을 말해서 무얼하냐?"며 핀잔을 주었다지만, 만일 공자가 그랬다면 그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골은 우리에게 "준비해라. 준비해라"고 북소리치듯 경고한다.
준비해라, 준비해라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여전히 캄캄했네.
목소리가 들렸어. "일어나라,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바야흐로 왕이 도착했는데, 등불은 어디 있는가? 꽃은 어디에 있지? 그분이 앉으실 방석은 어디에 있나?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연회장도 없고 장식도 안 돼 있고. 누가 말했네, "수선을 피워봐야 모두 쓸데없는 일. 맨손으로 문간에서 그분을 맞이하자. 홀로 텅 빈 방을 거닐게 해 드리자"...
사실, 인간에게 있어 '사랑'과 '죽음'의 문제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에 속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결코 회피할 수 없다. 독자들은 이 뛰어난 예지를 가진 시인들의 눈을 통해, 사랑과 죽음을 들여다보며 흐트러진 지금의 생활을 다시금 새롭게 추수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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