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붙은 '출세표' 반창고"

등록 2001.12.14 18:10수정 2001.12.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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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용등급 재하락 우려!?(재경직)"
"전쟁은 일어나도 행시는 붙는다."
"극비문서 회계사 합격자 장부 공개!"

요즘 대학 캠퍼스를 둘러보면 쉽게 눈에 띄는 현수막들의 톡톡 튀는 문구들이다. 언뜻 보아서는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내건 현수막이라고 생각되기 힘들다. '축 합격'이라는 형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으레 드러나기 쉬운 권위와 출세의 으쓱거림도 재미있는 문구와 요란한 표현들 앞에 찾아보기 힘들다. 합격한 친구에게 '수고했다'고 말하듯 현수막을 동여맨 학교 안의 나무들은 인사 건네기 바쁘다.

지난 3일 사법고시 합격자가 발표되면서 올해 국가고시 시험결과가 거의 드러났다. 올해 총991명이 합격한 사법고시는 매년 증가하는 인원만큼 축하를 건네는 현수막도 물 좋은(?)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학 입학원서 접수 기간에 맞춰 각 대학은 고시합격자 명단으로 학교를 포장하기 바쁘다. 서울시립대 정문 바로 뒤에 위치한 전농관에는 건물 정면을 드리우는 대형 현수막이 올해의 시립대인으로 행정고시합격자를 알리고 있다.

동아리, 학과 동기, 동문들의 이름으로 걸린 현수막도 한 몫 거들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듣고 함께 학교생활을 했다는 인연으로 자기 소속 선배, 동기들이 이룬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은 심정들일까? 한편으론 내심 부럽기도 할 테다. 취업난이 가중된다는 이 시절에도 명망있는 국가고시 합격했다는 것은 확실한 취업 보증수표일 테니 말이다.

이런 현수막을 보는 대다수 학생들은 "매년 학교 홍보용으로 붙여왔던 거라 새삼스럽지 않고 그저 합격자들 참 고생했다는 느낌이 들 뿐이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내년 청년 실업난이 사상 최악이 될 걸 생각하면 그저 남의 잔치 집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는 반응도 보인다. 시립대 한 학생회 간부는 "고시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합격을 곧 인생의 지름길로 받아들일 것 같다"는 지적을 하며 현수막의 의미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 학생회 간부로서 "합격자 현수막들 너무 많아서 학생회 현수막 걸 때가 없다"며 "짜증난다"는 심정도 감추지 않았다.

실업과 합격, 이 시대의 작은 단상

얼마전 한 은행입사 시험 결과가 세간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다수의 응시자가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음에도 입사시험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믿었던 마지막 카드가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의 허탈감이 밀려왔을 것 같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 힘들게 보낸 대학 4년의 대가치고는 너무나 어이없는 현실이다. 이제는 대학에 걸린 현수막들의 유쾌한 문구들이 민망스럽게 다가갈지도 모르겠다. 최악의 실업대란과 요란한 고시합격 현수막. 이 시대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고 그 걸 느끼게 하는 작은 단상이다.

추워진 날씨에 오늘도 기말 시험을 보기 위해 도서관으로, 강의실로 발걸음을 재촉하는 학생들의 머리 위에 현수막이 회색 빛 하늘을 가린다. 도서관은 많은 학생들의 취업공부 열기로 넘쳐나고 있다. 지금 학교는 당장 내년이 걱정스런 예비졸업자들의 근심과 한숨에 하얀 '출세표'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과연 학교는 출세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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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꿈을 해몽한다" 작가 김훈은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언어의 순결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날을 "말은 질펀하게 넘쳐났고 삶의 하중을 통과하지 않은 웃자란 말들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불어갔다"고 부끄럽게 회고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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