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잔에 떠오른 오만과 위선

<송광사 여름수련회 수행기 15>

등록 2001.12.17 11:01수정 2001.12.1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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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저녁 예불을 마친 뒤 간단한 과일과 차를 차려두고 자유롭게 모여 앉았다. 먼저 지도법사는 수련회 지원자의 선발 기준에 대해 말해주었다. 절반을 불교도로 하고, 나머지의 30%는 카톨릭을 비롯한 타종교를 신봉하는 사람, 20%는 종교가 없는 사람을 선별했다고 했다. 타종교를 믿는 사람을 30%나 뽑은 데에서 송광사의 열린 자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의 수련 경험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차 한잔을 나누며'라는 순서가 시작되었다. 호명된 사람은 앞으로 나가 자기를 소개하고 참가하게 된 동기와 수련 소감 등을 이야기하였다. 함께 생활하면서 그 신상이 궁금했던 도반들도 있었던 차, 호기심을 풀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모두가 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지도법사에 의해 선별된 도반만이 호명되었다.

가장 먼저 호명된 분은 남녀 최고령자들이었다. 62살과 60살이었다. 나는 입재식날 이번 기에 대학총장도 있다는 말을 듣고는 120명 중에서 대학총장일 것 같은 도반을 찾는 버릇이 생겼다. 대학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최고령자로 나선 분은 내가 속으로 대학총장 1순위로 지목한 분이었다. 이제 나의 관상법의 정확도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분은 참 구수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경남 통영에서 오셨는데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했다고 했다. 그 절실함은 술을 끊는 것이었다. 나의 관상은 엉터리였다. 하루 소주 3병을 마시고야 마는 남편이 걱정되어 그 아내가 잘 아는 통영의 어느 절 주지 스님께 신신부탁하여 겨우 추천을 받아내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수행 체험을 재미나게 이야기했다.

애초 수행을 위해서가 아니라 술을 끊기 위해 왔기 때문에 아주 가뿐한 마음으로 좌선을 했단다. 어느 순간 '성불사 깊은 밤에...'라는 가곡의 악상이 떠오르고 자기도 모르게 조용히 그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머리 속에 둥근 달이 떠올라 환희심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날도 뭔가 될 것 같아 좀더 열심히 수련했는데 더 이상 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그게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그럴 듯하게 해석했다.

여자 최고령자는 자기가 작년 자원봉사자로 왔고, 그때의 다짐대로 올해 수행자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양 때마다 옆 사람에게 이리저리 손짓 눈짓을 하던 것이 기억났다. 작년의 경험을 이웃 도반을 위해 베풀어준 것인데, 그 사연을 몰랐던 나는, '저 분이 왜 저리도 간섭이 많을까?'하고 생각했었다.


그 다음으로 호명되어 우리 앞에 선 분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동안 갖가지 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치며 나의 수행을 방해하던 바로 내 앞의 도반이었다. 그가 부산에서 온 교사라는 사실을 알고는 한번 더 놀랐다. 이번에도 내 관상이 엉터리임이 드러났다.

그는 두 쌍둥이를 둔 50대 가장이었다. 역시 교사인 아내와 함께 나왔는데, 그 아내는 남편이 수행에 대한 동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단서를 달며 여기에 오게 된 것이 술 때문임을 실토했다. 일 년 365일 내내 술을 마시기 때문에 송광사 수련회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소기의 목표를 이룬 것이라고 했다. 최소한 4박 5일 간은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송광사에 들어와 술 끊은 사람 적지 않다고 한 설법 스님의 말씀을 듣고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가 의아해했는데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런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도반을 비로소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술과 담배가 끊어지자 심한 금단증세를 느껴 몸부림쳤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아주 귀한 분'을 소개하겠다며 두 분을 호명했는데, 카톨릭의 수사님과 수녀님이었다. 수사님은 자정국사 사리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불교계가 포교원을 서울 등 대도시에도 세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가 혼이 났던 바로 그 분이었다. 지도법사는 그때 돈이 있는 당신들이 왜 포교원을 지어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나무랐다. 알고 보니 참 엉뚱한 나무람이었다.

수사는 돈이 없고, 또 카톨릭 수행을 하는 분이니 불교 포교원을 세우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 수사님은 혁신적 종교수행을 하고 계신 분인 것 같았다. 사찰 수련회에 참가한 것이 처음도 아니었고 서울에서의 불교 법회에도 여러 번 참석한 것 같았다. 막노동을 하면서 노숙자들의 세계를 체험했고 수련회에 참석하기 직전까지 알코홀 중독자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일을 했다고 하였다. 그의 말은 참신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다양한 체험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체험을 진술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 뒤에서 수사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수녀님의 마음은 편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카톨릭 성직자로서 수사님과 어느 정도 균형은 잡아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수사가 그렇게 말을 잘 하니, 자기도 말을 잘 해야 하겠고, 말의 수준이나 시간도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수녀님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불우노인들을 뒷바라지 하는 수녀님은 말이 필요없는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야기를 하였지만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왜 오게 되었는가. 왜 다리를 다쳤는가.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그 깁스를 어디서 했는가. 이런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수녀님은 산뜻하면서도 인상적인 끝을 맺을 대목을 찾으려 애썼다. 말의 아귀가 잘 맞지 않고 중언부언되니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몸을 비트는 수련생도 있었다. 그래도 수녀님은 산뜻한 끝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않았다.

나는 그때 수녀님의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좀 늦기는 했지만 수녀님이 지금이라도 멋진 마무리를 하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나 그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았다. 수녀님은 여전히 주절주절 재미없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사고가 터졌다. 어떤 수련생이 세차게 손바닥을 두드린 것이었다. 이어 여기저기 박수소리가 났다. 수녀님은 "아, 빨리 끝내라는 뜻이죠?"하며 분위기를 정확하게 읽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이야기가 잘 마무리가 되지 않아 안간힘을 다 쓰면서 꽤 긴 시간을 끌었다.

말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람에게 말을 요구하고, 할 말이 많지 않을 때 말을 길게 해야 할 상황을 만드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큰 짐이 된다는 것을 절감했다. 말을 끝내지 못하는 수녀님을 보고 나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어서 미국 유학 중 잠시 귀국한 여학생이 호명되었고, 깡패에게 엄청나게 얻어맞고 자기가 지은 업보를 없앴다는 젊은 여대생도 나왔다. 의정부서 왔다는 주부는 15년만의 휴가를 얻었다고 했다. 그녀는 수련회 참가자 명단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새벽에 출발하여 종무소 앞에 주저앉아 시위를 하여 마침내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5일 동안 집을 비울 수 있게 해준 남편에게 감사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말문까지 막히는 것을 보니 무척 감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우리나라 남자들은 아내를 감동시키기에 참으로 유리한 여건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동안 집안 일을 해줌으로써 저렇게 아내를 만들 수 있다니. 그 도반에게 나는, "저는 당신 남편이 5일 동안 하고 계신 일을 11년 동안 해왔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기를 잘 했다 싶었다.

도반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차 한잔을 마시며'가 시작되면서부터 제발 지도법사가 나를 호명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묵언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 내가 저 앞으로 나가서 그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순간 공든 탑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반대의 상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나를 지명하는 시늉만이라도 내어야 하지 않나?' '저렇게 말의 앞뒤가 맞지 않고 더듬거리는 도반들도 지명하는데 왜 말 잘하는 나를 내버려 두냐?' '이번 송광사 수련회가 좀더 그럴 듯한 말로 정리되고 포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일고 있었다.

그래, 나를 무시할 리는 없겠지.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자리를 계속 지켰다. 다음이 꼭 나의 차례일 것 같았다. 나는 빨리 의무 방어전처럼 한 마디를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나는 지명되지 않았다. 나는 끝내 지명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 차례가 곧 올 것 같았던 예감과 제발 나를 지명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은, 내 차례가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으로 변해갔다. 아니, 애초 '내가 지명되지 말았으면' 했던 바람은 그 반대의 바람의 위장인 것 같기도 했다.

교수로서 행세한 날들이 떠올랐다. 나는 그 동안 어떤 자리에 참석했든, 사람들에 의해 윗자리로 떠받들여졌다. 사람들은 교수란 '인격자'이고 '말을 잘 하기에' 나서서 한마디 해주기를 요청했다. 학생들이나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나는 어느새 그런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말하기를 수줍어하고 말하기에 서툴렀던 시골 소년은 박학한 권위자로, 세상 일에 통달한 인격자로 행세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대접이 어색하였지만 어느새 나는 어느 자리에서든 그런 역할을 내가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몰라도 아는 체, 틀려도 틀리지 않은 체 하는 것이야말로 달변가의 전제였다. 머리와 가슴이 입과 혀를 진지하게 통제하여야만 말을 삼갈 수 있는데, 어느새 입과 혀가 독립하여 스스로 매끄럽게 말을 조작해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지도법사는 교수의 그런 폐단을 꿰뚫어본 것이 아닌가? 온갖 말 잔치에서 설치던 내가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그 하는 일들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도반들은 두루 지명했지만, 말에 관한 한 최고의 수준에 있다 할 교수의 자리에 있는 나를 지명하지 않는 데는 분명 깊은 뜻이 들어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그날 나는 송광사 맑은 물로 끓인 차 한 잔을 마시며 묵언 속에도 남아 있던 타성과 오만, 위선의 찌꺼기를 씻어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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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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