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 남은 마지막 물 한방울, 눈물

등록 2001.12.20 23:56수정 2001.12.2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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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을 나누며'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져 철야정진은 밤 11시경에야 시작되었다. 마지막 참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가 편안하게 들렸다. 오늘 밤만 지나면 돌아간다. 돌아가는 게 기다려지기는 하지만, 돌아가는 것이 이곳의 모든 것과 결별하거나 저곳의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으니 마냥 설레지는 않았다.


눈꺼풀을 내려 까니 방바닥에 물결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나비 형상이 나타나다가 부처님 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마침내 담박한 무채색 벽이 생겨나 시야를 막아주었다. 벽은 120 명 곁에 있는 내가 적막강산에 홀로 있는 듯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해주었다.

고요 속에서 꽤 긴 시간이 지나갔다. 4일 간의 일들이, 4일 간 떠올려진 나의 과거가 스쳐갔다. 아니, 내가 그런 상들을 떠올리고 있는 모습이 자각되었다. 그리고는 '자, 이제 그만'하며 나를 선정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적당하게 선정을 경험하고 가뿐하게 마지막 참선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끝낼 시간이 훨씬 지났는 것 같은데도 죽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도법사가 졸고 계신가. 내가 소리를 못들은 것일까. 반가부좌한 오른쪽 발목이 저려 오더니 오른 발 전체가 저렸다. 저림은 통증으로 변했다. 그로부터 몇 십분이 더 지난 듯 하니 왼발에도 통증이 느껴졌다. 오른 발 왼 발이 꺾여지는 듯 잘려 나가는듯 아팠다. 아, 미칠 것 같은 이 통증이 뭐람. 차라리 발을 뻗어 버리자. 그러나 그래선 안된다는 질책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잘 견뎠는데 마지막 참선에서 흐트러져서는 안되지. 갈 때까지 가야 한다. 이렇게 다독거렸다.

그때 '내 육신은 진정한 내가 아니다.' '나는 이제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육신에 이끌려 가서는 참된 주인이 될 수 없다.'하며 선사들의 가르침을 생각했다. 그래, 내 육신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발은 실체가 아니다. 육신도 그 육신의 통증조차도 환상이요 환각이다. 육신의 통증은 실재하는 아픔이 아니다. 나는 통증이 있는 듯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내 육신의 주인인 참 나를 보자. 내가 통증을 느끼고 있는 한 나는 여전히 환각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이 통증을 훌훌 벗어 던지는 순간 나는 성큼 참 나의 경지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추스렸다.

그러니 통증이 약해지는 듯했다. 얼마 뒤 마음이 다시 고요해지더니 통증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약간 울렁대는 진동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머리 속이 환해지고 띠 모양의 빛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그 빛 기둥을 따라 올라가는 듯했다. 환희심이 샘솟았다. 내가 천상 세계로 올라가고 있다고 나에게 되뇌였다. 나는 그 거대한 세계의 흐름에 나의 모두를 내맡겨 버렸다. 그렇게 얼마쯤 흘렀을까. '딱' 죽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천상 세계의 경험이 꿈결이었을까. 지도법사가 말했다.


"천당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했죠?"

그때까지의 정진은 대체로 20분 참선 뒤 10분 휴식을 하였다. 그런데 이 마지막 정진에서는 알려 주지도 않고 시간을 몇 배로 늘인 것이었다. 근기가 약한 수련생들은 통증을 이기지 못해 발을 뻗고 중간에 포기하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지극한 육신의 고통 끝에 이런 경지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송광사 수련회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것으로 참선의 경지를 비약시켜 주는 비법인 것 같았다.


어느덧 12시가 되었다. 수련회 마지막을 장식할 1080배 시각 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도법사는 절을 하면서 경전을 염송하거나 숫자를 헤아리지 말고 오직 가벼운 마음으로 절만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절을 하고 일어날 때에는 엄지 발가락으로 튀어올라 발레하듯 몸을 곧추 세웠다가는 다시 부드럽게 굽히라고 충고했다. 그러면서 건강이 나빠진 어떤 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20년 동안 도둑질을 한 도둑이 있었다. 도둑은 어느날 마음을 고쳐먹고 도둑질을 그만두었다. 과거를 참회하며 떳떳하게 살아가니 행복했다. 그런데 도둑질을 그만두면서부터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도둑질을 할 때는 밤마다 쌀 자루를 둘러메고 발뒷축을 들고서 발가락에 힘을 주며 내달았다. 그래서 건강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되자 그 발가락 운동이 모자라 몸이 아프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언제 끝나느냐고도 묻지 말라. 내일 아침이 되면 끝나 있을 테니. 절을 많이 하면 모든 것에 다 좋다. 특히 아랫배 군살을 빼는 데는 즉효가 있으니 다이어트 비나 내고 가라. 이렇게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사실 나도 좀 긴장하고 있었다. 3000배에 비하면 반도 안되지만 나는 아직 이렇게 많은 절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내 나이가 얼만가. 그렇지만 나의 분발심이 이번에도 충분히 위력을 발휘하리라 믿었다. 또 이번 수련회 기간 중 아침마다 108배를 하였으니 연습이 충분하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수건을 직사각형으로 접어 방석 윗부분에 놓았다. 절을 할 때 이마 받침이 되어 얼굴의 땀이 자연스레 닦이게 될 것이다. 드디어 절이 시작되었다. 1080배를 쉬지 않고 다 한다 예상했는데, 108배마다 짧은 휴식 시간을 주었다. 216배까지는 비교적 쉽게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목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주저앉는 도반들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이 두세 번 절하는 동안 한 번을 하다가 결국 드러누워 버리는 도반도 있었다.

절을 시작할 때는 매번 절마다 누구를 위하여 어떤 고통을 덜어달라 축원하기로 작정했지만 절이 거듭 되면서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오직 죽비 치는 소리에 맞춰 낙오되지 않고 따라 절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이 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절을 하여 내 마음을 어떻게 만들겠다 등등의 상념이 일어날 틈이 없었다. 내 머리가 땅과 같은 높이가 되듯 오직 나 자신을 숙이고 낮추고 무화하는 행위만이 계속될 뿐이었다. 무념무아라 말하는 것이 그리 과장은 아닐 듯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의식이 명료해지면서 나 자신의 행위가 포착되었다. 행위의 목표점인 방석이 눈에 띄었다. 이마와 손바닥과 무릎이 닿아서 만들어지는 방석의 형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나의 눈에 들어온 형상은 방석 위 수건에 만들어진 내 손자국이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수인 같았다. 선정인이 되었다가 전법륜인이 되기도 하고 미타정인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한 달 무렵, 아이는 한시도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손가락과 손바닥을 온갖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다양한 손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율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의 손은 부처님의 수인 모양을 정확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때 부처님의 수인이 갓난 아이의 손 모양을 본뜬 형상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아이가 그랬듯이 나도 절을 하면서 방석 위에다 부처님의 수인을 만들고 있었다. 내 안에 부처가 있거나 내가 부처일 수 있음을 그 닮음꼴이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있을 무렵에서나 가능했다. 500배를 넘자 힘이 겨워지기 시작했다. 온 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팔뚝을 타고 내려온 땀이 방석에 묻어 지붕의 형상을 만들었다. 땀이 흐르는 두 정강이가 기둥의 형상을 만들었다. 방석에 고승의 부도가 만들어졌다. 그 부도는 이윽고 허물어졌다. 방석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방석은 계곡이 되고 강이 되었다. 마침내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가 되었다. 내 몸에서 이렇게 많은 물이 나오다니. 나의 본체는 물이었다. 나는 물로 만들어진, 그래서 물이 빠져나가면 허물어지는 스폰지 같았다.

물이 흐른다. 물은 어디에선가 흘러 와서는 또 어디론가 흘러간다. 고이지 않는 물은 썩지 않는다. 흐르는 물은 나 자신이면서, 고이려고 하는 나 자신에게 흐르는 것이 순리임을 가르쳤다. 집착하지 말고 미련 갖지 말고 자연이 가르치는 대로 흘러 가라고 가르쳤다. 흐르는 물이 덧없이 흘러 가듯 나 자신도 그렇게 흘러 가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렇게 1080배는 흐르는 물의 가르침을 주셨다. 그리고는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1080배는 끝났다. 공허하기도 하다가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 육신과 정신은 한없이 정화되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30분이었다. 2시간 30분 동안 절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3시에 시작되는 새벽 예불 준비를 했다. 땀에 절은 몸을 씻고 옷을 대강 갈아 입고는 방석과 염불집을 끼고 대웅전 앞 마당으로 걸어갔다. 저쪽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왔다. 도량석 도는 스님의 장삼 자락이 휘날렸다. 스님은 그 머리보다 훨씬 큰 목탁을 걸고서 절의 마당을 돌고 있었다. 목탁에 연결된 두 줄의 막대기가 스님의 목덜미를 둘렀다. 죄수의 목에 채워진 칼과도 같았다. 스님은 누구의 죄를 사죄하기 위해 그들 대신 저리 무거운 칼을 쓴 것일까. 큰 목탁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맑았다.


모진 질병 돌적에는 약풀되어 치료하고
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되
여러 중생 이로운 일 한가진들 빼오리까
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 이나
이 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얽히었던 애정끊고 삼계고해 뛰어나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모두 성불 하사이다


만물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절집의 이곳저곳 구석구석을 도는 스님의 염불소리는 막 1080배를 끝내고 탈진해 있던 중년의 남자에게 애절하고도 간곡하게 들렸다. 염불과 목탁 소리는 새벽의 도량을 깨어나게 하고 온갖 티끌을 씻어주겠지만 저 아득한 지옥 세계에까지 들릴까? 아니 저기 저 속세의 그 누가 들어줄까?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공감이 사라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경쟁자요 적이 되기를 강요하는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만들 수 있을까?

오늘이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날이라는 사실이 다시 환기되었다. 그곳 사람들의 얼굴들이 스쳐갔다. 표독한 얼굴, 일그러진 얼굴, 험악한 얼굴들. '흐아, 흐아' 갑자기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포효하는 짐승의 소리였다. 아, 나에게 탐진치의 악업이 얼마나 깊히 내려져 있었던가. 닷새만에 그 뿌리는 완전히 뽑혀지지 않았다.

법고와 운판, 목어와 범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축생과 날짐승과 물속 고기들과 지옥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그 소리가 내 몸의 곳곳에도 스며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바꿔 먹으려 해도 신새벽의 소리들이, 밤잠 설친 스님의 저 비원이 우리의 이생에서는 아마도 이루어지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감상이 다시 일어났다. 그러다가는 가느다란 희망의 떨림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소망을 이뤄 가만히 미소짓는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가슴이 저며오는 듯 했다. 눈물이 글썽이는 것 같더니 안고 있던 방석 위로 뚝 떨어졌다. 내 몸이 한 방울의 물을 남겨 두었다. 그것은 내가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으로 드리는 참회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필요해서 일 것이다.

내 몸으로 들어온 물은 고이지 않고 흘러 갔다. 물과 함께 내 속의 모든 것도 흘러갈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흘러 가서 사라지면 참된 내가 남을까. 나는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내 속에 들어온 모든 것이 흘러 가면 결국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흐르는 물이 나였고, 나는 흐르는 물이었다. 나는 흐르는 것 자체였다. 그러니 수련기간 내내 나의 귓전을 떠나지 않았던 물소리는 바로 내 속에서 흐르던 물의 소리였다.

나는 종루 밑으로 내려가 감로수 한 잔을 마셨다. 한 잔의 물은 오늘 돌아 가는 길에 땀 방울로 떨어져 섬진강 강물로 흘러가다 어느 하늘의 구름이 되어 메마른 땅을 적셔 주는 비로 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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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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