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대신 지고 내려온 노루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등록 2001.12.30 19:50수정 2001.12.3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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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심심하다. 마루도 안 보이니 누구하고 노나. 사립 밖으로 승춘 아재가 지게를 지고 지나간다.

"아재, 어디가?"
"나무 하러."
"나도 갈래."
"넌 안돼."
"나도 이제 학교 다니잖아."

승춘 아재는 월운할아버지네 머슴이다. 우리 마을 네 집에 어른 아닌(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승춘 아재와 나 뿐이다. 내 또래 아이들이 있지만 모두 여자아이들이라 같이 놀아봐야 소꿉놀이의 아버지 노릇뿐이어서 마루와 놀거나 승춘 아재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손재주 좋은 승춘 아재는 Y자로 생긴 나무 가지를 다듬어 새총도 만들어주고 겨울이면 썰매도 만들어주는 좋은 친구(?)다.

내게 물러설 기미가 없자, 아재는 잘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마을 뒷산에 들어서는데 어디서 봤는지 마루가 나타났다. 이놈은 안 보이다가도 내가 어딜 가면 꼭 따라 나선다. 마루는 우리 마을 개 중에 제일 큰 덩치인데도 순해빠졌다. 낯선 사람을 봐도 잘 짖지 않고 저보다 클 것 없는 내가 걷어차도 그냥 슬며시 비켜버린다.

아재는 내가 마루와 뒹굴며 노는 산소를 지나 점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간다. 아재랑 마루랑 함께 있어도 처음 가보는 산길이라 좀 무섭지만 '학교다닌다'고 큰 소리 쳤으니 아무 말도 못한다. 아재한테 붙어 마루를 뒤에 세우니 좀 덜 무섭다.

산중턱쯤 오르자 아재는 지게를 내려놓고 나무를 시작한다. 나는 큰 굴참 나무에 올라가 편하게 걸터앉는다. 나무 밑을 몇 바퀴 돌며 올려다보던 마루는 심심한지 어디론가 가버린다. 아재는 잡목을 낫으로 쳐낸다. 나는 적당한 나무 가지를 운전대 삼아 부르릉 부르릉 운전 흉내를 내며 논다.

내 꿈은 십발이 운전수다. 김장철에 배추 실으러 물이 준 가을 섬강을 건너오는 트럭이 전기도 없는 그 마을에서 우리가 구경할 수 있는 유일한 문명의 이기였다. 대개 바퀴가 열 개였기에 우리는 그걸 십발이라고 했다. 십발이가 섬강 여울을 건너는 소리 들리면 동네 아이들이 다 나왔다. 잘 해야 일년에 한 두 번 보는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어른들이 배추를 다 올릴 때까지 자동차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댔다. 산같이 쌓아 올린 배추를 싣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십발이 운전수는 나의 꿈이 되기에 충분했다.

굴참나무 십발이로 한참을 달리다 보니 사위가 어둑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이 안 보이는 숲 속이라 더욱 어둡다. 둘러보니 아재도 마루도 보이지 않는다. 아재의 낫질 소릴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데 후닥닥하는 낯선 소리가 들린다. 팔뚝에 소름이 확 돋는다. 뭔가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소리 같다. 나무를 타고 내려섰는데(나무 위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걸 알만 한 나이가 아니었다) 아재가 몸을 낮춰 다가온다. 아재도 무서운 모양이다. 한 손가락을 입에 대 나를 조용히 시키더니 지게 작대기를 들려준다. 낫을 꼬나 든 아재 뒤를 내 키보다 큰 작대기를 끌고 따른다.

소리는 조금 떨어진 골짜기에서 났는데 우리 마루와 어떤 짐승이 어울려 싸우고 있었다. 마루가 짐승의 뒷다리 한쪽을 물었고 그놈은 뿌리치려고 뒷발질을 해댔다. 아재는 낫을 내려놓고 내게서 지게작대기를 받아 그 짐승을 내리쳤다. 우리를 보고 이미 기가 꺾였던 그 놈은 아재의 한 방에 조용해졌다. 아재는 그놈이 노루라고 했다.

아재는 지게에 나무 대신 노루 한 마리를 지고 산을 내려왔다. 승춘 아재와 나는 으쓱했다. 마루도 신나는지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먹구름도 걷히고 해가 다시 났다. 월운할아버지 댁 마당에 내려놓은 노루를 가지고 어른들 사이에 오가는 말은 이 노루가 누구네 것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었다. 마루가 잡았다면 우리 것이고 아재가 잡았다면 월운할아버지네 것이니 그걸 가리지 말고 마을 전체가 나누어 먹자고 했다.

고기는 명절 때나 먹어보던 가난한 산골 사람들이 그날 저녁은 모두 노루 고기로 훈훈했다. 어른들 말로는 아주 큰놈이라서 온 마을 사람이 먹어도 넉넉하다고 했다. 노루 뒷발질에 콧등이 찢기고 눈퉁이가 부은 마루도 푸짐하게 얻어먹은 것은 물론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마루를 함부로 걷어차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중 하나다. 담임한 아이들 수준에 맞춰 들려주면 매우 좋아한다. 전래동화나 그리스 신화보다 더 좋아한다. 아이들은 이야기 계속해달라고 떼를 쓰고, 나는 적당히 비싸게 군다. 그러면 아이들은 작전을 바꾼다.

"우리 보고 자연을 보호하라고 하시면서 어떻게 나무를 자릅니까?"
"맞아, 하지만 그 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 가스도 석유도 연탄도 없었거든. 더구나 난 일곱 살이었는데 뭘 알았겠냐?"
"노루를 잡으면 안 되잖아요."
"어허, 일곱 살이었다니까."
"선생님은 그러시면 안 되죠."
"40년 전 일이야."
"그래도 안 돼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다. 이쯤에서 내가 항복한다.

"알았다. 이어지는 마루 이야기는 내일이다. 그 대신 비밀은 지켜야 한다."
"당근이죠."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시골 이야기는 모두 신기한 모양이다. 강원도 산골의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시절을 아이들은 동화처럼 듣는다.

솜씨도 그다지 안 좋은 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모든 것이 풍족한 도시 아이들이지만 그들 속에 자연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이 있는 것 아닐까?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학원에서 학원으로 연결되고 어쩌다 시간이 남아도 컴퓨터와 노는 아이들이다. 숨막히는 콘크리트 숲에서 쳇바퀴 돌듯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이 문득 가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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