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새벽을 여는 저 손을 녹여라

순천 역전시장에서 만난 아름다운 손들

등록 2002.01.01 00:00수정 2002.01.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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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 역전시장의 새벽을 열고, 화톳불에 언 손을 녹이는 박도순 할머니의 주름졌지만 '아름다운 손'
ⓒ 오마이뉴스 노순택

2002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지난 한해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어지러웠던 2001년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어지러운 눈보라 속을 비틀대며 달려온 것 같다 / 긴긴 진창길을 도망치듯 빠져 나온 것 같다 / 얼마나 답답한 한 해였던가 / 속 터지는, 가슴에서 불이 나는 한 해였던가 / 일년 내내 그치지 않는 배신의 소식

- 신경림 ‘아름다운 손들을 위하여’ (한국일보, 2001.12.31)


이제 그 답답하기만 했던 2001년은 가고 새해가 밝았습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시속 1229km.

2001년의 마지막 남은 시간이 시속 1229km로 마구 달아나던 12월 29일 꼭두새벽, 전라남도 순천의 새벽시장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많이 작아졌지만, 이래뵈도 순천 역전시장은 1968년에 문을 연 이래 지금까지도 명맥을 잇는 순천에서 가장 큰 새벽재래시장입니다.

올해 일흔여섯이 되는 박도순 할머니를 만난 것도 그곳입니다. 시장에서는 ‘도장굴떡’으로 통하는 할머니가 꺼져가는 화톳불 위로 언 손을 녹이고 있습니다.

할머니에겐 ‘애물단지’와 ‘보물단지’가 하나씩 있는데, 마흔일곱 먹은 아들과 일흔아홉 잡수신 할아버지가 그들입니다. 누가 애물단지고, 또 누가 보물단지인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으렵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다만 할머니가 이 새벽시장에 노구(老軀)를 이끌고 아침을 맞는 까닭이 바로 ‘애물단지’ 때문이요, 또한 ‘보물단지’ 때문이라는 말씀만 전해 드리지요.

가게가 따로 없는 할머니의 장사를 위해 철물점 주인양반은 늘 가게 앞 빈자리를 비워둡니다.

새벽 4시에 문을 연 역전시장 상인들은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아침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는데, 이 따뜻한 국과 밥이 뱃속을 데워주고서야 움추린 어깨도, 굽은 허리도 좀 펼만합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이 아침밥상의 가격은 2천원, 꽁보리가 섞인 밥에 반찬이 무려 13가지라면 믿어지십니까.

일흔여섯 주름진 할머니의 거친 손과, 새벽을 연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뜨거운 아침밥상을 나르는 밥집 아줌마의 손....

위의 시에서 신경림 시인도 마침 그 '손'들을 주목하라고 했더군요.

추운 골목의 쓰레기를 치우는 늙은 미화원의 / 상처투성이 손을 보아라 / 허름한 공장에서 녹슨 기계를 돌리는 / 어린 노동자의 투박한 손을 보아라 / 새벽 장거리에서 생선을 파는 / 머리 허연 할머니의 언 손을 보아라 / 비닐 하우스 속에서 채소를 손질하는 / 중년 부부의 부르튼 손을 보아라


ⓒ 오마이뉴스 노순택
아름다운 손,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새해에도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002년에는 저 얼어붙은 새벽시장 할머니의 손을 녹여주는 따뜻한 세상이 오길 기원합니다. 2002년에는 서민들이 허리를 펴면서 큰 웃음지을 수 있도록, 이 나라가 힘없는 이들에게 저 '따순 밥'을 제대로 먹여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 언 손을 녹이는 화톳불과 주린 배를 채워주는 따뜻한 밥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 새해가 되어야 할 텐데요.
ⓒ 오마이뉴스 노순택


새해 1월 7일 오마이뉴스 전남동부판이 닻을 올립니다. 더 자세한 순천 새벽재래시장의 풍경은 1월 7일 전남동부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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