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정신이 경제도 살린다'

등록 2002.01.01 09:53수정 2002.01.0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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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나 좌파는 경제라면 주눅드는 경향이 있다. 부국강병, 경제발전.. 이런 이슈들은 보수와 우파의 전유물이고 진보는 기껏해야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장기적으로 경제발전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볼멘 소리를 하는데 그칠 뿐이다.

한나라당 김만제 씨가 김대중 정부의 정책이 사회주의니 페론주의니 빨간색칠을 하고 조선일보가 걸핏하면 나라발전의 비전이 없다느니 포퓰리즘이라느니 시비를 거는 배경에는 좌파와 진보파는 백성 굶어 죽이기 딱 알맞은 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암시가 숨어있다.

이해찬 전 장관의 교육정책으로 서울대 신입생들의 영어.수학실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다고 조선일보가 타박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설익은 창의력 교육' 탓에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끌 실력있는 인재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비난인 셈이다.

그러면 김만제 씨나 한나라당 그리고 조선일보 필진들이 머리속에 떠올리는 부국강병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박정희 정권 밑에서 산업화 수업을 받은 분들 답게 거창한 조선소나 제철소 혹은 끝없이 늘어선 공장들일 확률이 높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요새 미국이나 유럽의 잘나가는 첨단 기업들은 이런 것들을 보고 'Commodity Business'라고 부른다. 라면, 새우깡처럼 먹고 사는데 필요한 생필품 만드는 산업이란 뜻이고 그 뒤에는 굳이 끼어들어 봐야 별로 먹을 것 없는 후진국 장사란 암시가 깔려있다. 한 마디로 계륵(鷄肋)이란 뜻이다.

그러니 정말 알짜배기로 돈을 벌려 한다면 만사 제치고 거창한 공장부터 짓는 바보스런 짓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전자왕국이라는 일본이 죽을 쑤고 있는 것은 부실채권문제도 있지만 일본의 20세기를 먹여살린 워크맨같은 전자제품이 큰 이문이 남지 않는 'Commodity'로 전락한지 오래임에도 제때 이 사업에서 손을 떼지 못한 탓이 크다.


X-박스의 경우

마이크로소프트가 얼마전 'X-박스'라는 게임기를 출시했는데 소프트웨어 만드는 회사가 공장이 있을 턱이 없으니 멕시코에 공장을 가진 플렉스트로닉스란 회사에 생산을 전담시키고 있다. 게다가 MS는 'X-박스'를 한 대 팔때마다 100달러씩 손해를 본다. 김만제 씨 세대의 생각처럼 '장사를 하려면 공장부터 지어 생산원가에다 이문을 붙여 밤낮으로 기계를 돌리면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온다'는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기업행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진짜 수익은 'X-박스' 게임개발업체에 물리는 라이선스 요금이다. 향후 수백만개의 게임 타이틀이 팔리면 개당 100% 가 넘는 순익이 발생하는데 공장을 돌려 돈 벌 생각은 애초부터 관심 밖인 것이다. 결국 돈은 게임소프트웨어라는 원천기술과 아이디어 그리고 마케팅 기법에서 나온다.

그러면 플렉스트로닉스는 어떻게 수지를 맞출까? 답은 멕시코나 중국같은 곳에 공장을 지어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고 마른 수건도 다시 짜내는 비용절감 노하우를 적극 개발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업들이 지금 이런 20세기의 후진국 비즈니스로 21세기를 맞아야 하는가? 김만제 씨나 박정희 망령을 되살리지 못해 안달인 조선일보의 주장을 듣고 있자면 아무래도 그러자는 것 같다.

실리콘밸리에서 2년을 살면서 기자가 느낀 것은 어느 인종이나 문화권도 소위 '메인스트림'이라고 내세울 만한 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부처럼 와스프(WASP)들이 득세하고 있어 소수인종이나 이문화권 사람들이 주눅드는 분위기였다면 '90년대의 닷컴 열풍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미국좌파의 본거지인 버클리가 있고 샌프란시스코는 동성애자들의 천국이다. 조선일보식의 시각으로 보자면 '빨갱이'들로 득시글 거리는 곳이다. 다른 문화와 사고방식에 대해 똘레랑스의 자세로 열려 있었기에 활발한 문화교류가 일어났고 이런 열린 분위기가 닷컴 비즈니스가 융성하게 된 배경이라는 생각이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가진 이 캘리포니아가 지금 미국경제의 25%를 먹여살리고 있다.

실리콘밸리에 줄지어 들어선 서버나 PC가 기업의 자산이 아니다. 창의적이고 열린 자세로 활발하게 사고하며 새로운 비즈니스를 연구하게 만드는 분위기,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 내는 마케팅 파워가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문열 씨의 '부악문원'처럼 작가지망생들을 모아 합숙시키며 창의력 훈련을 시킨다고 없던 인재가 느닷없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장담컨데 '부악문원'에서는 절대로 21세기 시대정신을 이끌어 갈 작가가 나오지 않으리라 본다. 오히려 인터넷상에서 끊임없이 논쟁하고 부딪히는 젊은 정신에서 희망의 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보적 의식과 똘레랑스가 비즈니스와 시장창출의 원동력이다.

영어.수학을 도구과목이라고 한다. 박정희시대, 산업화시대의 공장들 역시 이제 칼이나 망치같은 단순도구로 위상이 격하됐다. 더 이상 큰 돈을 벌게 해주는 신통한 무엇이 아니다. 기가 막힌 비즈니스 아이디어, 그리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만 있으면 나머지는 플렉스트로닉스같은 '21세기 도구'들이 알아서 근사하게 제품으로 만들어준다.

도구와 비즈니스를 헷갈리지 말자. 중요한 것은 이제 아이디어와 창의력이다.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KnowHow 대신 KnowWhere' 라는 구호가 유행했다. 달나라에 가고 전투기 만드는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면 이제 모든 지식은 얼마든지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Commodity'가 돼버렸다는 뜻이다. 인터넷에 오른 정보만 가지고도 핵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지 않는가? 조선일보와 한나라당의 교육관은 수십년을 가르쳐 이미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이런 '단순도구'를 만드는 아이들을 키워내자는 소리나 다름없는 주장이다.

한나라당의 의원들은 당신들의 사모님들이 해외만 나가면 하나라도 더 못사 안달하는 루이뷔똥, 사넬, 프라다, 구찌 핸드백들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제조원가라고 해야 수십만 원도 되지 않을 이런 사치품들을 수백만 원을 불러도 못 사 안달인 것은 이들이 단순한 가방이 아니라 여기에 창의적 디자인과 시대적 안목, 그리고 유럽의 풍부한 인문학적 전통이라는 부가가치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태리와 프랑스의 사치품업자들은 고급스런 마케팅으로 이런 요소들을 극대화 했던 것이다.

않되면 되게하라는 박정희식 부국강병, 김만제식 경제발전이라는 20세기 산업화 시대의 의식으로는 절대로 이런 비즈니스를 일구어 낼 인재들은 나오지 않는다. 머리염색도 안되고 사회주의도 안되고 친북도 안되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온통 안되는 것 투성이인 조선일보식 사고방식으로도 역시 나오지 않는다.

좌파와 진보는 주눅들지 말 것이다. 소위 '빨갱이'들의 자유로운 사고가 21세기 대한민국의 부국강병과 경제발전을 열어줄 열쇠다. 새해를 맞는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화두다.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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