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무한지면' 예찬

등록 2002.01.02 16:03수정 2002.01.0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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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기자의 글을 읽은 오프매체에서 가끔 원고를 청탁해올 때가 있다. 신문지면은 한정되어 있으니 대개 원고지 몇 매라는 분량을 정해주게 마련인데 지면제한이 없는 인터넷에서의 글쓰기에 익숙해진 사람으로선 보통 고역이 아니다.

인터넷에선 내키면 수십 장 분량으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고 아니면 문장 몇 개로 끝을 내도 누가 시비 걸 사람 없지만 분량이 정해진 신문지면에선 하고픈 말도 잘라내야 하고 자신만의 개성적인 문체도 살리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일간지가 우후죽순 생기고 <오마이뉴스>같이 어지간한 오프매체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지닌 매체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들이 일간지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대개 기사의 길이가 신문에 비해 2~3배 이상이다 보니 속보성보다 심층분석에서 더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말이 일간지이지 주간지, 심지어 월간지와 비교될 정도로 장문의 심층분석기사가 날마다 등장한다.

인터넷 매체의 강점이 뚜렷하게 비교되는 사례가 최근 있었는데 바로 <딴지일보>와 <조선일보>의 민주당 대선주자 인터뷰다. 두 매체의 성향이 워낙 차이가 나다보니 질문의 내용도 천양지차였지만 기자의 눈에 더 띄었던 것은 도대체 <딴지일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조선일보>의 수박 겉핧기식 인터뷰였다.

정치적 고려 탓에 그다지 성의도 없었겠지만 지면제한이란 요소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반면 <딴지일보>는 '일백번 고쳐 묻는다'는 우스개처럼 아주 뿌리를 뽑는 질문으로 인상적인 인터뷰를 꾸며냈다.

신문지면에선 나름대로 꽤 장문이라고 생각한 기사를 인터넷 자매지로 옮겨 놓으면 다른 인터넷 일간지의 보통 기사보다도 더 짧을 때가 많다. 기사의 길이가 전문성과 심층성을 보장해주는 척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할 말이 많은 기사는 그만큼 더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한다.


'신문에 인이 박혔다'


우리 신문의 기사 길이가 언제부터 짧아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런 흐름을 조장하는데 <조선일보>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스포츠신문 같은 경우는 1면의 거의 70%를 헤드라인과 사진으로 채우기도 하는데 비쥬얼과 제목뽑기에 들이는 정성의 절반이라도 기사의 질에 쏟았다면 지금처럼 이도저도 아닌 기형적 '한국형 권위지'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구신문이 모든 것의 척도는 아니지만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인터넷으로 읽다보면 최소한 두번 세번 페이지를 넘겨야 할 정도로 기사의 길이가 길다. 이런 기사를 한정된 신문지면에 편집해 넣으려면 당연히 제목 키우기를 자제해야 하고 사진이나 편집기교에도 제한이 따르게 마련이다.


물론 가독성을 중시하고 제목이나 슬쩍 보고 지나치려는 사람에겐 불편할 수 있지만 명색이 권위지라면 기사의 논리적 일관성과 설득력을 위해서라도 어느 수준 이상의 장문기사는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겠다.

우리 기준에는 이렇게 장문인 수십 개의 기사를 되도록 신문 1면에 모두 소개하려다 보니 제목과 첫번째 단락만 1면에 등장하고 대개 기사의 나머지는 후속페이지에 이어지도록 편집을 한다. 따라서 "~~ 페이지로 이어짐"이란 후렴구가 기사마다 붙어 있게 마련이다. 아니면 1면에 인덱스를 배치해 오늘의 기사목록을 한 눈에 알아볼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편집최우선 정책이 <조선일보>의 독자를 늘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활자크기 키우고 제목 멋있게 뽑고 그래픽을 활용하는 테크닉 면에서 <조선일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함은 동종업계에서 인정하는 사실이다. 눈에 쏙쏙 들어오는 편집에 익숙해진 어르신들은 드디어는 조선일보에 '인이 박혔다'고 자인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편집에 기사가 끌려다니다 보니 기사가 점점 짧아지면서 말초적 감각에만 신경을 쓰게 되고 선명한 논리적 일관성이나 심층성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극적인 제목과 편집으로 찰나에 불과한 독자의 시선을 잡아두려는 반면에 기사본문의 길이는 갈수록 짧아지니 터무니 없는 논리의 비약이 자주 발생하고 기사의 소재 역시 선정적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정치보도에서도 계파분석이나 세력간 갈등같은 눈길을 끄는 '휴먼드라마'에나 집중하고 구조적 모순이나 제도개혁에는 무관심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편집 우선의 지면정책도 한 몫 했을 것이라는 기자의 개인적 추측이다.

생각을 담는 그릇이 이런 식의 말초적이고 선동적인 기사만을 조장하다보니 결국에는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도 천박하고 논리의 깊이가 없는 기사와 칼럼들이 득세를 부리기 시작한다. 김대중 칼럼이나 류근일 칼럼의 해악은 그 사람들이 지닌 물신주의적 천박함과 논리의 경박함에서 근원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조선일보>에 팽배한 편집우선주의도 한 몫 했을지 모르겠다.


<조선일보>는 한국판 괴벨스?

20세기를 돌이켜보면 차분한 논리와 설득보다 비쥬얼과 감성,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작동하는 원리에만 통달해 큰 일을 저지른 인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히틀러의 나팔수 괴벨스다. 괴벨스의 선전·선동 전략이 없었다면 과연 히틀러가 독일민중을 동원해 그런 엄청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조선일보>가 날마다 뽑아내는 지면의 제목들, 선전·선동에 가까운 사설과 칼럼들을 보면 한국판 괴벨스가 다름 아닌 이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 논리의 천박함이나 무지함, 그리고 독자의 시선을 붙들어 두는 동물적 후각에 있어 나찌의 괴벨스와 쌍벽을 이룰 만한 <조선일보>임에도 한국인들에게는 눈에 쏙쏙 들어오는 1등신문 혹은 비판신문이라는 터무니 없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비극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에겐 확장된, 아니 거의 무한에 가까운 인터넷이란 지면이 있다. 묻고 또 물어 일백번 고쳐 묻는 백골진토 정신으로 무장한 수많은 네티즌들로 득시글거리는 인터넷 공간에서 <조선일보>의 조급증에 가까운 난장이 기사와 칼럼들이 여지없이 깨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인터넷 보급 초기에 활자매체를 몰아내 사회의 경박함을 조장하리라던 일부 전문가들의 예측을 보기좋게 무너뜨리며 인터넷은 오히려 사회적 논의의 장을 넓히고 심화시키고 있으며 편집기교로 가득한 <조선일보>의 찰나적 이미지에 현혹되는 구세대 독자들을 일깨우고 있다.

인터넷의 무한지면이란 특성은 올해 대선공간에서 그 진수를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지난 `97년 대선에서 사이비 수구신문들의 선전·선동에 휘둘리고 감질맛 나는 TV토론에 아쉬워했던 유권자들은 '일백번 고쳐묻는' 인터넷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

j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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