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의 연결고리, 종묘

등록 2002.01.02 18:45수정 2002.01.0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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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살게 되면서 시간날 때 자주 찾게 되는 곳이 바로 종묘입니다. 단정하고 장엄한 '정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게 됩니다. 종묘는 회초리를 들고 호통을 치시는 무서운 선생님이 아니라 품에 안아 등을 다독거려주며 '바르게 하거라' 인자하게 꾸짖어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할까요.

12월 31일 저녁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1월 1일은 꼭 종묘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달력사진 중 사진가 배병우 씨의 '종묘의 정전 설경'을 너무나 인상깊게 보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새해 첫날을 종묘에서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는 바람에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종묘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지붕에 쌓인 눈은 햇볕에 데워진 기와 때문에 조금씩 녹아내리며 고드름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뜰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았고, 사람의 모습도 많이 보이지 않아 차분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종묘가 여느 궁궐이나 문화재와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살아있는 자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특별한 구조물은 없어도 반듯하게 예를 갖추고 있는 정전과 영녕전의 자태는 찾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를 숙이고 겸손함을 잃지 않게 만듭니다.

언젠가 어느 잡지에서 많은 건축가들이 종묘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 선현들의 집짓기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습니다.

건축에 대해 아는 바 없지만 종묘는 하늘과 땅을 조화롭게 연결해주는 고리와 같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축가들도 종묘를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삼고,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이유일 것입니다.

종묘의 역할은 단지 제례를 지내는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울의 기운을 중심에서 올곧게 잡아주는 것이라 합니다. 북한산에서 시작된 기운이 응봉을 지나 창덕궁을 거쳐 종묘에 모이고, 다시 인현로를 타고 흘러 남산에 이르는 기운의 중심에 바로 종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현로를 막고 선 세운상가가 흘러가야 할 '기'의 흐름을 막고 서 있다 합니다.


곁가지겠지만, 무작정 짓고 부수고,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개발'을 하기 전에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이 한번이라도 종묘에 와서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깊이 했더라면 좀더 나은 서울이 되지 않았을까요.

조금이라도 시간 여유가 있으신 분들은 종묘를 한번 찾아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정전'의 넓은 뜰 귀퉁이에 서면 자신의 복잡한 생각을 추스르고, 잠시라도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복잡한 서울생활에서 종묘를 찾아야 할 이유로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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