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길과 흔적도 없는 나의 길

<김해화의 새벽에 쓰는 편지 11>

등록 2002.01.06 13:14수정 2002.01.1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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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에서 표시하고 있는 시각은 새벽 5시 30분, 아침밥을 챙겨먹어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새벽일을 나간 지 벌서 스무 해가 다 되어 가면서 어느새 아침밥을 스스로 챙겨먹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창원에서 순천으로 이사를 하고부터였으니 삼년째 접어드는 일이지만 그전에도 곤히 잠든 아내를 깨우는 것보다 내가 새벽밥을 챙겨먹는 것이 편해서 라면을 끓여 찬밥 한 덩이를 말아먹고 새벽길을 나서고는 했지요

아내는 그런 나를 위해 잠들기 전에 국과 밥 한 그릇을 준비합니다. 나는 아내가 준비해 놓은 국을 뜨겁게 데워 찬 밥 한 그릇을 말아서는 순식간에 먹어치웁니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책 몇 줄 읽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전날의 작업일지 정리하고 확인할 것 확인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보면 언제나 새벽출근길이 바쁩니다.

그럴 때 밥 먹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뜨거운 국물에 찬 밥 한 덩이를 말아 뜨겁지도 차지도 않는 국밥을 퍼넣는 것이지요.

여섯 시가 되면서 가로등과 아파트단지의 외등이 꺼져버린 세상은 한밤중보다 더 캄캄합니다.


서둘러 작업복을 챙겨 입고 더듬더듬 주차장의 차를 찾아 시동을 켜면 나와 함께 낡아가며 여기저기 신경통을 앓고 있는 9인승 승합차는 몇 번이나 기침을 해대다가 겨우 엔진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옵니다.

함께 동광양까지 가야 할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야 10분, 신호등은 물론 무시해야 합니다.


동료들을 태우고 또 한 곳을 거쳐서 동광양까지는 40분 정도 걸립니다. 신호등은 물론 규정속도를 무시하지 않으면 일 시작하는 시각까지 공사장에 닿을 수 없습니다. 시속 120km 신호무시, 이렇게 목숨을 걸고 달리면서도 원칙은 있습니다.

교차로나 횡단보도에서는 일단정지, 이 시간에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우리의 동료들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새벽길을 달리기 때문에 충분히 확인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으니까요.

SK주유소 지나 무인카메라 앞에서는 규정속도, 이렇게 광양을 지나면서 6시 35분, 오늘도 늦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고개를 넘어 10분쯤 달리면 동광양입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동광양의 컨테이너부두 너머 밝아오는 하늘이 창에 가득 차옵니다.

이렇게 새벽길을 헤쳐온 것은 낡은 95년식 승합차인데 웬일인지 내가 숨이 가쁩니다. 이제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길, 천천히 속도를 줄입니다. 늦어도 6시 50분이면 현장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사리밭이라고 했습니다.
가시덤불과 크고 작은 나무와 풀들이 뒤엉켜 한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수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조선낫 한 가락으로 길을 내면서 앞서 가셨습니다.
끝도 없을 것 같던 아사리밭에 아버지는 그렇게 한 줄기 길을 내셨고
그 길 끝에서 사람들은 탐스러운 참두릅이랑 고사리랑 깨츰 같은 귀한 나물로 나물망태를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 험한 아사리밭에도 한 번 지나가시면서 길을 내신 아버지-
나는 이십년 넘게 새벽길을 목숨걸고 달리지만
내가 지나온 길에는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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