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깃발, 민심타고 '펄럭 펄럭'"

정범구 의원 "새로운 질서는 선배 의원들의 몫입니다"

등록 2002.01.07 16:09수정 2002.01.0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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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는 민주당 내부 상황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가운데, 여야 개혁성향 의원들의 한해 맞는 마음가짐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지난 4일, 민주당 김근태 정대철 정동영 고문과 한나라당 이부영 부총재 김덕룡 의원이 결성한 '정치개혁을 위한 중진의원 협의회'의 신년 간담회 자리는 이 같은 분위기를 잘 보여줬다. 민주당 당무회의로 상황이 복잡했음에도 불구하고, 20여 명이 넘는 의원들이 참석해 2002년 '정치개혁'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다.

앞을 향해 힘차게 내딛는 말들, 그 위로 큼지막하게 쓰여진 '2002년 정치 바꾸는 해'라는 표어가 자리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한 의원은 이를 보고 "착찹한 심정이었는데 말을 보니까 힘이 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예정 시간이 가까와지자 자리를 마련한 정대철 정동영 이부영 김덕룡 의원 등은 속속 들어오는 의원들을 반갑게 맞으며, 고무된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한화갑 고문과 문희상 의원이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고, 사진 기자들의 셔터 누르는 소리는 쉼없이 터져나왔다.

주최측 한 의원은 "민주당 상황이 숨가쁜데도 많이 참여해 주어 고맙고 감격스럽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 모임을 주선한 의원실의 한 관계자도 "당초엔 뜻을 같이하는 원외위원장들과 재야인사들까지 초청할 예정이었지만, 자릿수를 감안 원내 정치인들에게만 초청장을 돌렸다"며 "현 정국을 볼 때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고 말했다.

민주당 이재정 김태홍 김성호 이호웅 정장선 정동채 의원, 한나라당 김홍신 안영근 김영춘 안상수 의원 등 20여 명이 참석한 이날 간담회는 정동영 고문의 사회로 한명씩 돌아가며 덕담을 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여야가 서로 엇갈려 공개적으로 상대방을 칭찬하기도 했다. 김태홍 의원은 "지난해 연말 대단한 용기를 보여준 김홍신 의원은 훌륭한 분이다"고 추켜세웠고, 안영근 의원은 "꼬마 민주당 시절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소신을 지킨 김원기 고문을 참 존경한다"고 말했다.


'존재의 이유'

서로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부담없이 새해 인사를 하라는 게 정 고문의 주문이었지만, 실제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은 예사롭지 않았다. 신년 하례 형식을 빌렸지만, 실질적으로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자유토론 형식으로 자리는 흘러갔다. 가장 큰 화두는 역시 '정치개혁'.


가장 먼저 마이크를 잡은 안상수 의원은 "정개특위 위원으로 활동해왔지만 정치 개혁은 힘들더라"며 "무엇보다 돈 안드는 정치, 지역주의 탈피, 진정한 권력분립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뒤이어 "단순한 모임으로 그치지 말고 제도의 틀을 바꾸는 결실을 맺었으면 좋겠다"(김성호 의원), "기존 정치권에 자극을 주고 국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김영춘 의원) "정당 민주화를 이루는 데 정말 중요한 시기"(김덕룡 의원) "바꾸고 변혁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김태홍 의원) "바꾸지 않으면 모두가 추락한다" (김홍신 의원) 등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목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왔다.

정동채 의원은 "정치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뜯어 고쳐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하 수 없다. 다급하다"고 촉구했고, 이호웅 의원은 "민주화운동 할 때 가졌던 청년시절의 그 붉은 마음을 갖고 정치개혁을 하자"고 호소했다.

정대철 고문은 '정치개혁' 방향에 대해 ▲청와대·대통령 행정 중심에서 의회·의원 중심으로 ▲보수·1인 지배에서 국민 중심 정당으로 ▲지역중심 정당에서 전국정당으로 ▲투쟁위주의 정당에서 정책대결 정당으로 등 4가지 중심이동이 필요하다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준비된 자세를 보여줬다.

16대 국회 개원 이후 지금까지 무성한 논의만 한 채 실질적인 성과물은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여기 저기서 제기됐다.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가? 특히 '정치개혁을위한의원들의모임'(정개모)이 노력한 국가보안법 개정, 크로스보팅 등을 되돌아봤을 때 얻어낸 것이 뭔가. 한계가 느껴진다" (이재정 의원)

"바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인데 현실 정치의 벽이 너무나 완고하다. 언론플레이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거창한 표현보다는 사안에 대한 실천이 필요하다" (이호웅 의원)

한 초선 의원은 이런 상황을 놓고 "'우리가 사기치는 거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며 자괴심을 표하기도 했다.

시간은 충분(?)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지금까지의 한계를 넘어 실천적인 개혁을 이뤄내는 2002년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그 일차적으로 거론된 것이 향후 정국의 뇌관으로 불리는 '개헌'에 관한 문제였다.

이부영 부총재는 "87년 단임제 개헌론은 장기집권을 막는다는 목적아래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는 동시에 양김의 변칙적 합의가 만들어낸 소산이기도 하다"며 "단임제의 폐해가 노출되고 있고, 현재의 선거시스템은 비효율적인 만큼 개헌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가장 먼저 '개헌론'을 제기했다.

이어 그는 "단, 최근의 경우처럼 집권세력, 특히 여당 대표가 개헌문제를 거론하면 이합집산이라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으므로 안해주는 게 건강한 논의를 위해 도움이 될 듯 싶다"고 한광옥 대표를 겨냥하기도 했다.

또한, 같은 당 김영춘 의원은 "정치개혁의 긍극적 목표를 위해 개헌은 불가피하다"며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거들었으며, 김덕룡 의원도 "개헌에 대해 시간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시간은 충분하다. 현행 헌법이 잘못돼서 고친다면 왜 선거 후에 해야 하냐?"며 공론화를 촉구했다.

민주당 측에서도 개헌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제기됐다. 김근태 고문은 "지금 이대로 가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초기엔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을, 후기엔 실패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며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택기 의원은 "집권자들을 위한 개헌이 아닌 국민을 위한 개헌이 필요하다"면서 "현행 우리 헌법은 미국과 달리 일정 수준의 사람이 봐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국민들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한눈에 이해하기 쉽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바꿔야 한다"고 다른 시각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은 "헌법은 정말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중임제 개헌론은 다시 독재자를 양산할 수 있다"며 "개혁화두로는 부적절하다"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오늘은 '선포식' 자리

의원들의 허심탄회한 이야기 속에서 일면 '개혁신당'을 암시하는 발언도 제기됐다.

모임 자리 초반에 김덕룡 의원 등이 "이런 자리가 신당운동처럼 보도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찍혀 버린다. 이런 경우 처신에 부담을 갖는 의원도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여야 초선 의원들의 목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정범구 의원은 "작년을 거치며 앙시엥 레짐(구체제)이 와해·붕괴 직전에 왔는데 대체할 새질서가 없어 착찹할 뿐이다. 김의원의 우려가 맞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 신상품은 정당을 말한다. 신상품을 만들 노하우를 누가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며 "대체할 새질서에 대한 몫은 선배 의원들이 기본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압박을 가했다.

새로운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 수준은 높아졌는데 정작 정치권이 맞춰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 '비상한 각오와 도전이 필요하다'는 대목에 이르러선 듣고 있던 김덕룡 의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한나라당 안영근 의원도 "현재와 같은 구조로는 차기에 어느 당, 어느 주자가 되든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이다"면서 "자신이 떨어져도 좋다는 결심이 없으면 말의 해에 '말'만 바꾸는 해가 될 것이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여야 개혁성향의 중진 의원들이 주최한 신년 간담회는 '덕담'의 차원을 넘어 향후 이들의 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논의의 장이 됐다는 게 지켜본 관계자들의 말이다.

여야 개혁성향의 초재선 의원들과 중진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눴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개혁신당을 모색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오늘의 만남으로 이들이 정계개편의 핵으로 부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지난해에 비해 한층 더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정가의 또 다른 관계자는 "개혁과 보수신당이 모두 거론되고 있는데, 선후 관계를 따진다면 개혁신당이 먼저 태동해야 보수 신당도 가능할 것이다"며 "보수신당만 생기기엔 국민들의 정치 불신이 너무 깊다"는 의미있는 전망을 던지기도 했다.

4일의 간담회 자리를 정동영 고문은 이렇게 정리했다.

"오늘의 자리는 쇄신 의지를 다지는 '선포식' 같은 자리다. '2002년 정치 바꾸는 해'라는 표어를 신영복 선생님은 아마 굉장한 열의와 정성을 다해 쓰셨을 것이다. 정치를 쇄신하는 길만이 희망이다. 오늘 올린 깃발이 민심의 바람을 타고 펄럭일 것을 믿는다"

과연, 이들의 행보가 현 정국에 엄청난 '빅뱅'을 일으키며, 올해를 정치개혁의 원년으로 삼을 수 있을지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47호

덧붙이는 글 2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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