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 사립대, '소수서원'을 찾아서

[문화유적답사13] 자유로움 속에 내재된 엄격함

등록 2002.01.07 18:52수정 2002.01.1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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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경북 내륙에 자리잡은 영주 '소수서원'까지 찾아가는 길은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여행이다. 기차 배차간격이 잘 맞아 떨어지질 않아 몇 번을 갈아탄 기차 안에서는 각기 다른 목적으로 각기 다른 곳을 향해 여행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일 뿐, 너무 멀어지기 위해 경계하지도 또 너무 가까워지려고 안달하지도 않는, 그저 잠시 한 방향을 향해 함께 가는 객들일 뿐이다.

서울에서 얼마나 달렸을까. 소수서원에 가기 위해 내려야 할 역인 풍기역 근처에 거의 다왔을 때 기차는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힘을 쓰기 시작하는데 그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유려한 경관은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마침 풍기역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굴뚝 같이 우뚝 선 구조물에 마치 이발소 그림과 같은 촌스러운 인삼 그림이 보이는데 인삼의 본고장 풍기에 온 것을 반겨주는 듯하다.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에 바로 면한 인삼시장도 여유를 갖고 찬찬히 한바퀴 둘러보자. 역 광장에서는 마침 5일장이라도 열리고 있다면 날짜를 잘 정한 셈이 될 것이다. 그 이름 모를 산나물들에서부터 각종 한약재들이란. 도회지에서는 도무지 보기 힘든 광경이다.

승용차를 가지고 왔다면 모를까, 배낭 하나 사진기 하나 달랑 들고 온 나홀로 답사객이라면 이곳 사람들의 표정도 살필 겸 버스를 타는 게 가장 나을 듯싶다. 역 광장을 나오면 바로 오른쪽으로 주차장으로 보이는 공터를 지나 버스 안내를 해주는 허름한 상점이 하나 있다. 버스 요금이야 현금으로 내도 되지만, 이런 곳에서 누런 갱지에 잉크로 등사한 버스표 한 장을 사보는 것도 한 묘미가 아닐까.

풍기에서 소수서원까지는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려 20여 분이면 도착한다. 서원 주변엔 마땅한 숙식처가 없으니 성혈사나 석교리 석불상, 읍내리 고분벽화 등도 둘러볼 생각이라면 가까운 순흥 읍내에 일찌감치 방을 먼저 잡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편액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의 현판으로, 명륜당 안 대청에 걸려 있다. ⓒ 권기봉
소수서원은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에 면해 있는 조선시대 최초의 사립 교육 기관이다. 일찍이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 수업을 통해 익히 들어 알고 있을 주세붕(1495~1554)에 의해 세워진 서원으로, 원래 창건 초기의 이름은 계곡 이름을 따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었으나, 퇴계 이황이 이곳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 받아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선 말 대원군이 서원 철폐 명을 내리지만 이곳 소수서원만은 다른 46개의 서원과 함께 계속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서원에 웬 당간지주? 소수서원이 있던 자리는 원래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서원 곳곳에 불교 유적들이 널려 있다. ⓒ 권기봉
그런데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걷다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솔길 오른쪽으로 절집에서나 볼 수 있는 당간지주 한 기가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비단 당간지주뿐만이 아니라 서원 내 곳곳에 석등이나 석탑의 지대석으로 보이는 석재나 각종 부재들이 널려 있다. 실제로 이곳 소수서원이 있던 곳에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1953년에는 수십 개의 금동불이 발견되었다고 서원 내에 위치한 사료전시관에서 알려주고 있다.

늘씬하게 뻗은 당간지주를 살펴보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죽계천을 잠시 바라보자. 가까이 다가가 보면 원래는 맑았을 것이나 지금은 흙탕물만 보일 뿐이다. 죽계천을 중심으로 서원의 반대편에 무슨 양반 마을을 조성한다고 하는데 그 공사로 인해 탁해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그 흙탕물 너머로는 작은 정자와 함께 바위에 음각과 함께 붉은 색으로 짓게 덧칠해진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한자어가 보인다.

취한대 옆에는 이처럼 큰 바위에 ‘경’자와 ‘백운동’ 자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경’자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전한다. ⓒ 권기봉
정자는 퇴계가 지은 것으로 이곳에서 숙식하던 유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그리로 통하는 철제문이 잠겨 있어 건너갈 수가 없다. 취한대 보호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입장료를 지불하지 않고는 소수서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위함일까, 한낱 답사자로선 알 수가 없다.

한편 취한대 왼쪽으로 물에 변한 큰 바위면에 ‘경’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전한다. 먼저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며, 의로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이 한다)’의 ‘경’을 의미한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단종 복위운동으로 명을 달리한 선비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지만, 앞서 말한 숙수사라는 절을 폐하면서 사찰의 불상 등을 바로 이 죽계천에 모두 내다버렸는데 밤마다 곡소리가 들려와 퇴계 선생이 그를 달래느라 ‘경’을 새겨넣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성생단 제사 때 지내는 제물의 적합 여부를 판별하던 성생단으로, 서원 입구 옆에 있다. ⓒ 권기봉
이제 ‘설’들은 뒤로 하고 서원으로 들어서자. 잠깐. 서원의 입구를 막 들어서려는 순간 또 사람 발길을 잡는 것이 있다. 문 오른쪽으로 나지막한 정자가 한 채 있는데, ‘경렴정’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또한 문 바로 왼쪽 아래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흙 두둑이 있다. 이는 ‘성생단’으로 춘향사와 추향사 때 제물로 바칠 짐승의 적합성 여부를 판별하고 잡던 곳이라고 안내판에 친절히 설명되어 있다.

명륜당 소수서원의 강당인 명륜당이다. ⓒ 권기봉
이제 문을 들어서자. 그럼 답사객을 가장 먼저 맞아주는 강당 ‘명륜당’ 앞에 서게 된다. 명륜당은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이 함께 모여 강의를 듣던 곳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 밖의 편액에는 ‘白雲洞’이라고 적혀 있으나 건물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조선 명종의 친필 편액인 ‘紹修書院’을 발견할 수 있다.

명륜당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오른쪽으로 지락재와 학구재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지락재는 학구재와 함께 유생들이 주로 기거하며 공부도 겸하던 건물인데, 바로 뒤로 죽계천이 흐르고 있어 유생들이 밤새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할 수 있었으리란 상상을 해본다. 한편 이 건물은 학문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세 칸으로 꾸몄고,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건물 입면을 '工'자 형으로 지었다고 한다.

직방재와 일신재 유생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로 쓰인 직방재와 일신재이다. 특이하게도 온돌방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 권기봉
한편 지락재와 학구재의 왼편으로는 일신재와 직방재가 펼쳐진다. 이 두 건물은 가운데 온돌방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지락재, 학구재와 마찬가지로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당시 소수서원의 규정에 따르면 생원이나 진사 초시 합격자를 일차적 입학 대상으로 삼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특별히 사림의 동의를 거쳐야 입학이 가능했다고 한다. 특히 서재에 기숙할 수 있는 유생의 수를 10명으로 정했다(이후 30명 정도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고 하는데 마치 오늘날의 소수정예 기숙학교를 보는 것만 같다. 게다가 이곳 소수서원을 거쳐간 인원만 총 4천여 명에 육박한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장서각 서원의 책을 보관하던 장서각이다. ⓒ 권기봉
직방재와 일신재를 지나서 있는 건물은 이 소수서원의 각종 서책들을 보관하던 장서각으로 벽은 그저 평범한 나무판자로 되어 있다. 이전에도 살펴 보았듯이 이곳 소수서원은 이전에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곳 장서각 앞에도 숙수사의 것으로 보이는 석등의 부속물로 보이는 조각들이 남아 있다.

장서각에서 오던 방향을 계속 보면 낮은 담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에 건물이 한 채 외로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소수서원의 사당이다. 본래 서원은 공부를 하는 곳이긴 하지만 서원마다 받드는 선생이 한 명씩 있고 그에 대한 제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곳 소수서원의 경우에는 우리나라 성리학 연구의 선구자라 할 문성공 안향 선생을 중심으로 고려 말의 문신인 안축과 안보 형제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특히 안축은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남긴 이다.
사당 문성공 안향을 중심으로 안축, 안보 형제를 모시고 있는 소수서원의 사당으로 서원 건물 중에서는 유일하게 단청이 칠해져 있다. ⓒ 권기봉
역시 사당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단청을 화려하게 칠해져 있고, 담장으로 다른 구역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사당과 장서각을 양쪽으로 두고 뒤에 나앉은 건물은 사당에서 제사를 지낼 때 그 음식이나 집기들을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던 전사청 건물로, 사당이 있는 건물에는 으레 전사청 건물이 있게 마련인데 종묘에만 가도 볼 수 있는 것이 전사청이다.

다시 전사청에서 학구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면 영정각이 중간에 가로놓여 있다. 영정각은 말 그대로 영정들을 보관하던 건물인데, 현재 영정각 안에 있는 안향의 영정은 고려 충숙왕 때 처음 그려졌던 것을 명종 때 다시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으로 소수서원에서 볼 만한 건물들은 모두 한번 돌아본 것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구재와 영정각 사이로 문이 나 있고 그 너머로 멀리 한옥 건물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옥은 아니고 한옥을 모방한 양옥이라고 할까.

여하튼 이왕 여기까지 걸음한 것, 한번 가 보자는 심산으로 발걸음을 뗀다. 왼쪽으로 보이는 관리인들의 기거 공간이던 고직사를 지나면 아까 보이던 그 ‘한옥의 모습을 한 양옥’인데 돈이 꽤나 들었을 법하다. 이는 소수서원과 관련한 사료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사료전시관과 교육관으로, 어째 소수서원보다 크고 넓은 터를 차지한 것이 소수서원을 압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이 안에는 나름대로 둘러볼 것이 많아 다행스럽다.

'백운동' 현판 사료전시관 내에서는 이처럼 귀한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백운동’ 현판이다. ⓒ 권기봉
소수서원과 백운동의 옛 현판들이라든가 각종 영정들, 당시에 강학을 하던 모습을 모형으로 꾸며놓은 것 등 건물 외양만 보아서는 쉽게 알기 힘든 것들을 전시장을 돌아가며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전시관 안에는 붓글씨 연습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서원에 왔다는 포만감으로 붓글씨 연습을 할 수 있을 듯하다.

소수서원을 답사하면서 받는 느낌 중 가장 강렬한 것은 그 자유로움이다. 소수서원보다 후대에 세워진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등과는 달리 건물배치 면에서의 그 자유로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이 들게 하지 않는 포용성을 갖추고 있는 듯 보인다.

제향 사료전시관 내에 있는 모형으로 제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반드시 주신재가 창작한 도동곡이라는 경기체가를 창하는데, 이는 중국 공자의 도가회헌에 의해 우리 나라로 옮겨진 것을 높이 찬양한 것이다. ⓒ 권기봉
실제로 다른 서원들에서는 대부분 작은 차이는 있겠으나 ‘전학후묘’라는 질서에 따라 앞 부분에는 강학을 위한 시설을 들이고 서원의 안쪽 깊숙한 부분에 사당을 지었는데, 이곳 소수서원만은 이미 답사했듯 사당이 강당인 명륜당의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일례로 건물 배치 면에서 엄격한 규율은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를 두고 무질서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소수서원이 죽계천이나 주위 둔덕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 모습을 보면 그런 말은 쉬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넌 다리 밑에서 주워 왔어!" 우리나라 사람치고 다리에서 주워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말의 유래가 된 청다리이다. ⓒ 권기봉
한편 마지막으로 소수서원을 답사하며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것으로 소수서원 뒤의 ‘청다리’를 들 수 있다. 어렸을 적 대부분의 사람들이 ‘넌 무슨무슨 다리에서 주워왔어’하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 말의 어원이 청다리에 있는데, 청다리는 또 소수서원과 관련이 깊다. 가치판단 여부를 떠나 요즘 대학가에만 가보아도 대학가가 있는 곳엔 으레 숙박 업소들이 몰려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만큼 청춘 남녀간의 연사가 많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4천여 명이 다녀간 소수서원도 혈기왕성한 유생들이 모였기 때문인 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즉 유생들이 함께 데리고 온 종이나 마을 아가씨와 연분이 생겨 아이를 낳게 되는 수가 있었는데, 분명 신분상 그대로 낳아 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굴린 결과 생각해낸 것이 다음과 같다.

즉 일단은 출산을 한 다음 다리 밑에 잠시 버려두었다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척 해, 고향 집에다가는 ‘다리 밑에 버려진 아이를 주웠다’는 등의 말을 하고 데려다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 하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이 같은 과정을 주워졌기에 이런 말이 전국에 회자되게 되었을까.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넌센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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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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