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아들이 납북됐으면 가만히 있겠어? 우리를 무시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지."
생사도 모른 채 길게는 30년을 기다려온 가족들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살아온 듯했다. 금강산도 가고 이산가족의 상봉도 이루어지고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아들과 아버지의 기약없는 만남을 생각하면 더 더욱 그렇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북에 잡혀간 남편이 내려오면 신고하라는 경찰의 감시 속에서 살면서 자녀들은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과거엔 냉전의 한파 때문에, 지금은 남북의 화해무드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납북자 가족들이 이제는 국가의 책임을 묻고 나섰다. 16일 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 최우영(여. 32) 씨가 서울지방법원 민사2부에 '대한민국 정부가 헌법에 명시된 국민 보호 의무를 방기하였다'며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최 회장은 소장을 접수시키면서 "납북자들의 송환은 커녕 생사확인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채 북송을 희망하는 비전향 장기수는 전원 북송되었다"며 "우리의 송환 요구를 방해하고, 어줍잖은 논리로 무마하려 하는 한심한 정부에 대해 우리의 정당한 의사와 권리를 주장하려는 것이다"고 밝혔다.
가족의 아픔을 배상하라
이날 손해배상소송에는 모두 12가족이 참여했고 이들이 손해배상액으로 청구한 금액은 한 가족 당 2000만 원이었다. 소송을 준비한 납북자가족협의회 김태영 사무국장은 "우리가 이 소송에서 꼭 승소해야 하는 이유는 아직 숨 죽이고 있는 많은 납북자 가족들이 언제든지 국가로부터 배상액을 받을 수 있도록 판례를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김 사무국장은 또 "모두가 겪어야 했던 생활고를 생각하면 돈 문제도 중요하지만 생사확인이라도 할 수 있게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 이번 소송의 가장 큰 목적이다"고 밝혔다.
무료 변론을 맡은 임광규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청구한 이번 소송을 준비하기까지 납북자 가족들은 한없이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안타깝기만 했다.
지난 77년 8월 11일 친구와 인천 송도로 놀러간다고 집을 나간 뒤 전라남도 홍도에서 행방불명된 이민교(남, 당시나이 19세) 씨의 어머니 김태욱(71) 씨는 실종 20년이 지난 뒤에야 아들이 납북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아들을 찾아 전국을 헤맨 김 할머니는 지난 94년에 체포된 남파간첩들에게서 아들이 평양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학생을 아냐"고 물어보자 남파간첩 한 명이 "나에게 남한 말을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고 해서 아들을 알아봤다고 한다.
아들이 북한에서 고생 안하고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김 할머니는 "그 남파간첩에게 '혹 북으로 송환되면 아들에게 내 안부 좀 꼭 전해달라"라고 부탁하니 "그 사람이 '저나 아드님이나 시대를 잘못 태어나서 그렇다'며 울먹이더라"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저쪽(북한)에서 납북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다"는 답변만 들어야만 했던 김 할머니는 현 정부의 통일정책을 비난하기도 했다.
"장기수들을 모두 보냈으면 납북된 사람들도 돌려 보내주어야지. 국군포로 문제도 여태 내버려두고 있잖아. 생사 확인해준다고 해놓고선 맨날 기다리게만 했어."
"생사를 알아야 제사라도 지내지"
가족이 한꺼번에 3명이나 납북된 경우도 있었다. 동생인 막내가 태어난 지 3일만에 납북되어 29년째 아버지 박광원(당시 32세) 씨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들 박근균(34) 씨는 같은 배를 탔던 친척 할아버지 두 분도 함께 납북되는 아픔을 겪었다.
74년에 어선 수원 32호를 타고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어로 중에 납치된 아버지 박광원 씨의 얼굴마저 떠올리기 힘들어진 아들 박 씨는 어릴 적 고모의 웅변대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미그기를 끌고 이웅평이 87년도에 남하했을 때 고모가 '아버지를 돌려 달라'고 웅변대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부가 납북자 가족들의 처지를 대북 반공정책에 이용해 먹고 이제는 '쉬쉬'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가지고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어선 안 됩니다."
박 씨는 또 "아무런 조치도 없이 이용만 당했다"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면 제사라도 지낼 것 아니냐"며 무책임한 정부를 비난했다.
생사도 모르지만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는 가족도 있었다. 박연수(36) 씨는 아버지 박동순(당시 49세) 씨가 고깃배 희영 37호를 타고 나갔다가 백령도 근처에서 납북된 뒤로 고생하면서 살아온 어머니 임희순 씨의 처지를 무척이나 가슴 아파했다.
"아버지가 납북당하셨을 때 어머니는 저보다 젊으셨어요. 그 나이에 재혼도 하지 않고 갖은 고생하며 저희들을 혼자 키웠다는 걸 생각하면 여자로서의 어머니의 삶이 너무나 불쌍해요. 생사가 확인돼 서신이라도 교환할 수 있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온 것을 아버지께 넋두리라도 하고 싶어하세요."
박 씨는 "아직 아버지 소식은 모르지만 호적상으로 사망신고도 했고 매년 제사도 드린다"고 말했다.
꽃피는 내년 봄에 올지도…
박 씨는 또 "작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인권위원회에 납북자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위원회 쪽에서도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에 손 쓸 수가 없다'고 말한 걸로 안다"고 덧붙였다.
가장 최근인 87년 1월 15일 동진호 납북사건 때 남편 최종석(당시 41세) 씨와 생이별하여 정확히 15년을 기다려온 부인 김태주(53) 씨는 몇 해 전 남편이 수용소에 있다는 신문보도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나마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며 기다림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 양반 환갑이 되어야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혹 모르죠. 꽃피는 내년 봄에 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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