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나라당 가면 대환영이다"

민주 은평갑 당원, 조직책 선정 반발 당사 점거

등록 2002.01.23 19:44수정 2002.01.3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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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갑 원천무효'라고 쓰인 흰색 머리띠를 맨 당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 오마이뉴스 최경준
민주당 사고지구당 조직책 선정과 관련 은평갑 지구당원들이 23일 오전 중앙당사 4층 대회의실을 5시간 동안 점거하고, 한광옥 대표의 사과와 재심을 요구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민주당은 전날 37개 사고지구당 중 하나인 서울 은평갑 조직책에 동교동계 구파이면서 이인제 고문 측근인 조재환(비례대표) 의원을 떨어뜨리고, 한화갑 고문과 가까운 개혁 성향의 이미경 의원을 선정했다.

김영준 서울시의원, 이희원 은평구의회의장 등 은평갑 지구당원 150여 명은 이날 오전 7시30분부터 당사 대회의실을 점거한 채 "은평구민 우롱하는 낙하산 조직책 반대한다", "당원의 뜻을 무시한 밀실선정 규탄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조재환 의원의 조직책 선정을 주장했다.

이들은 또 '은평갑 지구당 당원 일동' 명의로 된 재심요청서와 34명의 주요 간부 서명부를 당무위원회에 제출했다. 민주당은 이날 당무회의를 열고 사고지구당 조직책 결정사항을 보고할 예정이었으나 이들의 점거농성으로 무산됐다.

▲이들은 이날 김밥과 물을 마시며 농성장을 지켰다. ⓒ 오마이뉴스 최경준
이들은 재심요청서에서 "은평갑 지역주민과 지방의원 당원 및 지구당 간부 등의 의견을 조사한 실사자료는 묵살한 채 인기투표하듯이 졸속 처리한 조직강화특위의 조직책 결정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며 전면 백지화와 재심을 촉구했다.

이들은 또 "강남의 아파트지역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여성조직책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민정서를 가지고 있는 지역"이라며 "지역주민과 당원들과 일면식도 없고 지역연고도 없는 여성조직책을 낙하산식으로 결정한 조강특위의 처사에 절대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양수 조직위원장은 "조직책 결정은 번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날도 추운데 뭔 낙하산이여!"

이들의 농성이 길어지자 오전 9시15분쯤 당사에 모습을 나타낸 조재환 의원이 농성을 하고 있는 대회의실에 들어가 비공개로 이들을 설득했지만 농성을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다음은 회의를 마치고 나온 조 의원과 기자들의 일문일답이다.

▲이들 중 3분의 2는 아주머니들이었다.ⓒ 오마이뉴스 최경준
- 무슨 얘기했나.
"다시 한 번 나를 도와달라고 했다. 협조해서 돌아가야 내 명분이 선다고…. 그것이 당과 대통령과 지구당을 위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위한 행동이니 더 이상 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개인문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당인으로서 당명에 따를 것이다."

- 재심요청은 했나.
"당연히 기본적으로 요청했다."

- 조직책 선정에서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나.
"조직강화특위 위원들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라서 말할 수 없다. 최소한 지각 있는 분들의 양심을 담보로 잡았기 때문에 기다리겠다."

한광옥 대표의 면담을 요구하던 이들은 오전 11시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점거하러 가자"며 21명의 대표단을 구성해 3층 대표최고위원실로 향했고, 이를 저지하던 대표비서실 당직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고성이 오갔다.

"날도 추운데 뭔 낙하산이여!"
"당신들은 월급이나 받지만 우리는 10원짜리 하나 못 받으면서 봉사하는 사람들이여."
"우리가 이 정신으로 한나라당 가면 대환영이라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 지방선거, 대선 전부 기권해버려. 죽 쒀서 개 줄려고 투표하러 가나."


▲이협 사무총장이 이희원 은평구의회의장 등을 만나 설득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최경준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협 사무총장은 대표단을 총장실로 불러 "우리는 한나라당과 다르다"며 "50년 전통을 가진 우리들은 모두 동지들이니 이러지 말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설득했다.

오전 11시40분쯤 동교동계인 김옥두 의원도 사태진화에 나섰다. 김의원은 대회의실에 남아 있던 당원들에게 "조재환 의원은 내가 사무총장으로 있을 때 조직위원장을 맞아 전국을 책임졌던 사람으로 (조직책에서 떨어진 것에 대해)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며 "같은 동지로서 대통령을 지킬 사람은 조의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언론에 이런 모습으로 비취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은 결국 오후 1시쯤 점거농성을 끝내고 지역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하향식 공천, 불씨 여전히 남아

이날 농성에 참석한 한 당원은 "(지구당)당직자들 중 이미경 의원을 아는 사람들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분위기로는 조직책으로 와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조직위원회의 한 관계자도 "오늘 온 당원들이 수는 적지만 은평갑 지구당의 80%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핵심당원들"이라며 "다만 일이 잘 풀리기만 바랄 뿐"이라고 말해 조직책 선정과 관련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를 만나겠다고 들어가려는 지구당 당원들과 이를 막는 대표비서실 당직자 사이에 고성이 오가며 충돌이 있었다. ⓒ 오마이뉴스 최경준
한편 지난 22일 확정한 37개 사고지구당 조직책 선정은 민주당이 당 쇄신안 중 상향식 공천을 도입하기로 한 상태에서 중앙당 차원의 마지막 하향식 공천이자 총재직 사퇴 이후 1인 보스체제가 무너진 후 첫 조직책 선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는 상향식 공천이 이뤄지기 때문에 중앙당이 개입해 지금과 같이 조직강화특별위원회를 통해 하향식으로 조직책을 선정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박양수 조직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 이후 특정인이나 계파가 당을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직책 선정이 이뤄짐에 따라 특히 각 시도지부장이 해당 시도지부 지구당에 대해 사실상 전권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이번 조직책 선정에서도 본격적인 대선후보 경선 국면을 앞두고 그 동안 당을 장악해왔던 동교동계 구파 인사들과 이인제 상임고문 측근들이 일부 조직책 선정에서 밀려나 눈길을 끌었다.

서울 은평갑의 조직책 선정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조재환 의원은 2년 전부터 동교동계 구파의 지원 속에 은평갑 지구당 조직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이미경 의원과 연청의 지원을 받는 조동회 씨가 가세해 3파전 양상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1인 지배체제에서 막 벗어난 민주당은 동교동구파가 아닌 개혁 성향의 이미경 의원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이날 발생한 은평갑 지구당원 농성사건은 민주당이 당분간 새로운 체제에 익숙해지기 위해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을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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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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