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민주화운동에 몸바쳤는데..."

계훈제 선생이 민주화보상법에서 제외된 사연

등록 2002.01.28 09:25수정 2002.01.2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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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후반 한 집회장에서 "구속 전두환" 띠를 두른 계훈제 선생(앞줄 왼쪽 세번째)의 모습. 선생 왼쪽으로 문익환, 백기완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 대한매일 포토라이브러리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접수번호 : 보상심의위 제 2175호
성명 : 계훈제
귀하의 보상금 등의 지급신청에 대하여 기각 결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2001년 11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조준희, 이하 보상심의위원회)는 작년 12월 계훈제 선생의 부인 김진주(71) 씨 앞으로 보상금 지급신청에 대해 기각결정 통지서를 보내왔다. 김진주 씨는 그 날 이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넥타이 한 번 매지 않고, 구두 한 번 신어보지 않은 채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친 대가가 이 정도란 말입니까."

고 계훈제 선생. 그는 한국의 상징적인 재야 인물이었다.


해방 전에는 강제 징집을 거부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뒤에는 통일운동과 반독재 운동으로 생애를 바쳤다. 3선 개헌 반대투쟁 상임위원, <사상계> 편집장, 긴급조치 9호 위반 투옥,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관련 수배와 투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부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상임고문 등 그의 이력은 곧 살아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였다.

계훈제 선생은 특히 5.18유공자 보상혜택도 마다한 일화로 유명하다. "군사정권이 내란음모 피해자들을 5.18과 억지로 결부시킨 것일 뿐, 5.18 자체를 위해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1958년 항일운동과 해방 후 진행한 통일운동 덕분에 그는 폐결핵으로 한쪽 폐를 도려냈지만, 평생 수배당해 쫓겨다니다 보니 나머지 폐도 성할 날이 없었다. 몇 차례의 복역 과정에서 번번이 만성폐쇄성 폐질환으로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1999년 3월 14일 타계했다.

1969년 8월 7일이 기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계훈제 선생이 보상결정에서 제외된 원인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2조 1호와 2호에 의한 것.

이 법률에 따르면 '민주화 운동'은 1969년 8월 7일(3선 개헌 발의일)이후 활동한 자를 대상으로 하며,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상이를 입은 자 △대통령령이 정하는 질병을 앓거나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인정되는 자 △유죄판결·해직 또는 학사징계를 받은 자를 민주화운동관련자로 규정하고 있다.

계훈제 선생의 경우 1950년대부터 폐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이 조건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보상심의위원회의 최종 결정이었다.

이 결정에 대해 민주화운동보상지원단 조명우 지원과장은 "법 자체가 보상법이다 보니 피해가 전제가 돼야 하고 간접적인 피해는 가려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부인 김진주 씨는 보상심의위원회의 이같은 결정을 수긍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1969년 이후에 병이 발생했다는 게 증명돼야 보상받을 수 있다니요. 이거 너무 편의주의적인 발상 아닙니까. 1970,80년대에도 하루도 쉬지 않고 민주화운동 계속했고, 투옥과 수배생활 하면서 폐결핵 때문에 얼마나 많이 고생을 하셨는데..."

이 사건 당시 보상심의위원회 본 위원은 조준희 보상심의위원회 현 위원장, 이우정 보상심의위원회 전 위원장, 김경동 서울대 교수, 김상근 목사, 김정기 방송위원회 위원장, 김철수 한국방송공사 이사, 백화종 국민일보 논설주간, 최학래 한겨레신문사 사장, 노경래 변호사 등 모두 9명. 소정의 절차를 거친 사건들은 최종적으로 9명이 참석한 회의를 통해 보상 여부가 결정된다.

이에 대해 이우정 보상심의위원회 전 위원장은 "계훈제 선생의 사망원인인 폐결핵이 69년 이전인 50년대에 발병한 병이기 때문에 위원회 안에서도 논란이 많았다"면서 "김상근 목사와 함께 (민주화운동관련자)인정해줘야 한다는 의견을 폈다가 다른 위원들의 반대로 인해 결국 기각이 결정됐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편 계훈제 선생이 보상법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에 대해 민언련 성유보 이사장은 "너무나 뜻밖의 결정"이라며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싸우시다가 그로 인해 얻은 병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데 법적 자구에 얽매여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다"며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법률에 갇힌 '민주화운동'

보상심의위가 보낸 기각용 통지서
김진주 씨는 요즘 통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그 정부가 만든 법에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그 기대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방법은 행정소송 밖에 없다. 보상결정서 전달 과정 중 우편사고가 발생해 30일 이내에 신청할 수 있는 재심청구도 보상심의위원회에서 현재 각하된 상태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기각 통지서를 받고 희망을 접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했는지 여부를 심사하는 칼자루는 다른 사람들이 쥐고 있는데, 소송을 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마 계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괜한 짓 한다고 노발대발 하셨을 겁니다."

1월 28일, 행정소송 제기

고 계훈제 선생의 부인 김진주 씨는 1월 28일 보상심의위원회의 보상 지급신청 기각과 관련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행정소송은 보상결정서 정본을 송달 받은 날부터 60일 이내에 진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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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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