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다움’ 의 허상 버리고 주부로 커밍아웃

'김전한의 살림하는 남편일기'

등록 2002.02.07 13:08수정 2002.02.0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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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인 김전한이 수필집 '김전한의 살림하는 남편일기'를 펴내며 작가에서 주부로 커밍아웃을 선언했다. 김전한 특유의 유쾌한 필치로 그려진 '김전한의 살림하는 남편일기'에는 자신이 경험한 주부생활의 애환과 즐거움, 그리고 주부생활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세상의 이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전한'이란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경제개발 5개년이 시작된 1962년 무장공비사건으로 유명해진 울진 앞바다에서 출생하였다. 일곱 살, 대구로 이사하여 아스팔트길을 처음 보았고 그해 여름 길거리 전파상 텔레비전에서 달나라에 도착한 암스트롱을 보았다. 열일곱, 안톤 체홉의 책들을 보면서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세상이 있구나 싶었단다.


그는 제도권 교육이 진절머리 나서 고등학교를 두 번이나 중퇴하고 詩를 만들고 읊조리며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다. 떠돌면서 알게 된 숱한 스승들 중 잊을 수 없는 베르그송 선생님. 검정고시로 계명대 철학과에 입학을 했지만 철학은 더 이상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992년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 당선되어 시나리오 작가라는 면허증을 받게 되었단다. 1993년 떠돌이 시절에 적어 두었던 詩들을 문화일보에 응모하여 시인 면허증을 발급받게 된다. 현재는 글쓰기와 살림살이를 주업으로 하며 또한 서울 필름 아카데미에서 시나리오 창작 강의와 잡지에 시나리오 서사 이론을 연재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를 주부라 한다. 잠자리에 들면 ‘내일은 뭘 해먹지’, ‘양파가 떨어졌는데’, ‘화장실 청소는 언제 했더라’, ‘아이 방 청소는 언제 했더라’와 같은 전업주부의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한 남편주부.

그도 한 때는 결혼생황에 대한 야무진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5년전, 오랜 자취생활에 지친 그는 결혼하면 당연히 식탁이 풍성해지리라 여겼고 또 당연히 요리는 아내의 몫이라 생각했다. 결혼전 그의 아내될 사람은 깔끔한 성격이었고 일거리도 있었다. 그는 ‘왔다’싶었고 룰루랄라 결혼했다.

신혼여행후 출장 갔다 오면서 그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나 해물탕 먹고 싶어.”
앞치마를 두른 아내를 보고 그가 속으로 하는 말.
‘어 자세 나오는데, 바로 이 거야.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 흐흐흐, 냄새 죽이고….’
드디어 등장한 해물탕.


그런데 마지막에 들어가야 할 쑥갓이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칭찬을 기다리던 아내에게 그는 순서가 잘못됐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입술을 부들부들 떨던 아내가 숟가락을 던지는 소리가 났다. “순서. 그게 그리 중요해. 조잡하게 그런 타박이나 하고…”

아내의 말에 대항할 단어를 머릿속에서 찾은 뒤 “그기 해물탕이가 잡탕이제. 니 저능아 아이가”이후의 전개는 드라마에서 많이 본 대로다.


아내는 울고, 그는 슬리퍼 끌고 현관문 열고 집 나서고. 막상 나갔지만 갈 곳 없었고 아파트 벤치에 이빨을 다닥거리며 앉는다. 데리러 온 아내, 그날 밤 그는 아내가 말하는 그의 조잡함에 대해 조근조근 지적당했다.

그 후 집들이다 뭐다 손님 치를 때 수저가 3개만 넘어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내 대신, ‘마파두부’만드는데 2시간이 넘는 아내 대신, 그는 ‘재능’을 살려 일을 처리한다. 그의 아내는 요리나 살림은 못해도 매사에 상황판단이 빠르고 이성적이었다. 그가 살면서 감탄하는 대목이 아내의 판단력과 명석함이었다. 아내는 직장을 다니며 석사과정 공부하느라 바빴고, 살림은 배째라 수준이었다. 허나 아내의 논문이 상까지 받았을 땐 그의 어깨가 으쓱해지기까지 했으니.

그래도 그가 많이 거들긴 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전업주부가 될 줄 몰랐다. 한때는 아내는 잘 나가는데 자신은 도서관에서 하루 진종일 죽치고 앉아있거나 했고, 그 자신 스스로 비참하다 여겼다. 그런데 살림이 재미가 있었고, 방치된 재능을 인정하기로 하면서 세상 사는 재미가 ‘마구’ 솟구쳤다. 살림살이 잘 하면서‘수신제가’하기로 하고 ‘치국평천하'를 뒤에 두기로 했다.

그는 말한다. “대부분의 남성님들, 처자식 부양하려 자신의 꿈을 접었노라 말하는데 그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나” 행복해지려면 인생의 척도를 조금만 수정해도 될텐데 도대체 그놈의 ‘남자다움’의 허상만 붙들고 살다니.

왜 모든 남성들은 치국하고 평천하만 해야 하는지,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법’이나 ‘이렇게 하면 아내한테 미움받는다’같은 쫀쫀한 교육을 받지못한 걸까 하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러하니 그의 말마따나 이 책은 ‘남자 우사 다 시키려’ 쓴 것이 아니고 남자들이 집안일과 맞닥뜨릴 때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하고, 남녀에 대한 통념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사람살이란 뭔지 등의 정서적 문제를 ‘남자들이 읽고 고민해주길’ 바라는 희망이 들어있는 게다.

신혼기를 넘어 아내의 임신, 육아를 거치며 그가 털어놓는 일상이 생생하고, ‘보통 여자보다 더 꼼꼼한 그의 전업주부 기질’에 탄복하게 된다.

그는 한국 최초의 디지털 장편 영화인 ‘봉자’의 시나리오를 책으로 펴냈으며, 장편소설 ‘은행나무 길에서 상아를 만났다’ 가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를 위해서 누구나 동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단다. 그래서 현재 집필 중인 책은 ‘평범한 부모가 어떻게 하면 아이와 함께 동화를 만들 수 있을까’ 에 관한 글이다.

그는 다음포털사이트에 '김전한의 살림하는 남편일기(http://cafe.daum.net/sman/)'라는 카페도 개설했다. 이곳에 인사말을 올린 소설가 이경자 씨는 "책을 받으면 우선 기쁘지만 참 유쾌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런데 몇 꼭지 읽지 않아서 그만 너무 유쾌했어요. 옆에 앉은 남편에게 읽어보라고 했지요. 중요한 거 한 두 군데 보여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긍정적이라고 해요"라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며칠 뒤면 설, 주부의 희생이 미화되기도 할 때, 굳이 가벼운 글쓰기체의 이 책을 소개하는 건 그의 ‘세상살이’를 보며 남자든 여자든 오래된 갇힌 습관과 세계관을 들춰보라는 마음에서다.

덧붙이는 글 | 김전한 지음. 238쪽. R&D Book. 7000원.

덧붙이는 글 김전한 지음. 238쪽. R&D Book.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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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잡지연구소 연구원 근무하다 버지니아텍에서 농공학을, 브라운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했으며 노스이스턴 공대 환경공학석사와 로드아일랜드대학 토목환경공학박사를 취득했다. 플로리다주 리 카운티 공무원을 시작으로 미연방공무원으로 국방성에서 근무했으며 현재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다. 2003년 한국정부로부터 5.18 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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