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이 무대 위에 있다. 이회창은 칼춤을 춘다. 정치 초단의 옷을 입고는 정치 9단의 능숙한 칼춤으로 무대의 관객들을 황홀케 한다. 이회창이 좌로 치면 좌로 돌고 이회창이 우로 치면 우로 돈다. 이윽고 관객들은 이회창에 대한 공포의 최면에 걸린다. 이회창은 말한다.
"나를 꺾을 자가 있으면 나오라."
관객들은 두려워한다. 감히 누가 적장 이회창의 칼에 대적할 수 있을까? 이때 이회창은 다시 최면을 건다.
"이인제만이 나를 이길 수 있다."
이인제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 위에 올라선다. 하지만 이인제는 이회창의 칼에 온몸이 난자당한 채 쓰러진다. 그 뒤로 관객들은 이회창의 칼춤에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최면에 걸리고 만다.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2002년 한국 정치 현실에서 벌어질 실제 시나리오이다. 거짓말 같은 시나리오라도 치밀하게 구성하고 하나하나 실천하면 현실이 되는 법이다.
"이인제만이 이회창을 이길 수 있다."
민주당의 호남 쪽 지지자들이 이런 말들을 내뱉고 다니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물론 자기 당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를 내보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한 명분도 없이 적군의 후보가 가장 손쉬운 상대로 점찍은 상대를 최면에 걸려 내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아둔한 일인가? 그런 전설 속 동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한심함을 참지 못하고 울분을 토해내는 젊은 정치 연사 장신기가 등장했다. 그가 이회창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최면에 걸린 관객들의 머리를 일깨워 구석에서 조용히 칼을 갈고 있는 진정한 무사를 무대 위에 올려보내는 역할까지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
이 명쾌한 한 마디에 관객들을 깨어난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 조용히 칼을 갈고 있는 노무현이 올라온다. 적장 이회창은 노무현의 칼에 쓰러진다. 예정된 시나리오는 이렇게 반전된다.
거름 출판사에서 나온 신간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거름, 2002)는 바로 그 젊은 정치 연사의 현실 인식을 활자로 구성해 놓은 책이다. 저자는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인터넷 신문 대자보의 정치팀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이론적 현실적 안목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지금 이인제를 지지하는 논리에는 명분이 없다. 이인제를 지지하는 것은 민주적 정통성이란 명분을 내세우기 어렵다. 그렇다면 최소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실리가 보장되어야만 이인제를 지지할 만한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명분이 약한 이인제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 대선에서는 이회창이 이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인제 대세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결국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는 싸움을 하자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8쪽)
이 책은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책이 아니다. 민주적 정통성, 개혁성, 당위성이라는 것은 한국 현실 정치판에서는 거의 먹히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철저히 정치 공학적 입장에서 이인제는 이회창에게 필패하고 노무현은 이회창에 필승한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낸다. 참으로 우습게도 이러한 논리를 한나라당의 이회창은 먼저 꿰뚫어 보고 있다. 얼마 전 <일요신문>에서는 한나라당의 대선 문건을 단독 입수하여 보도하였다.
"이인제 고문에 대해서는 '산업화 세대 지도자론', '대안부재론' 등을 주장하며, 통일과 정보화 혁명 등 범국민적 이슈 선점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경선불복종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반 이인제 영남표 결집, '세대교체' 이미지 부족 등이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문건은 이고문에 대해 사전 준비를 충분히 해온 데다 충청권의 분점 등을 이유로 상대하기 쉬운 후보로 저평가하고 있다.
노무현 고문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여권의 경선구도가 후보간 연대로 이어져 한화갑 고문이 당권을, 노고문이 대선후보가 될 경우 영남권에서의 상승 효과로 인해 이총재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총재의 약점인 세대교체론도 노고문의 강점으로 분석되고 있다."(2001년 12월 23일)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당 내에서 이인제 대세론이 퍼져나갔다고 판단한다. 이회창이 원하는 후보, 이회창이 가장 손쉬운 상대로 찍어놓은 후보를 민주당의 아둔한 관객들이 선출할 수 있도록 보수 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정치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조선일보에서 노골적으로 시도하는 이인제 경선 후보 만들기용 기사를 인용하며 이를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이인제 대세론이 아닌 이인제 희생양론을 내세우는 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 이인제가 민주당의 후보로 지명되는 순간, 전통적인 민주당의 개혁적 지지자들의 표가 이탈된다. 저자 자신부터 이탈자 중 한 명이 될 것이고, 필자인 나 역시 이탈자 그룹을 형성할 것이다.
둘째, 이인제가 후보로 되는 순간, 한나라당에서는 호남충청 연합론을 제기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건반사적으로 영남대동단결론이 나올 것이다. 표의 결집력과 인구비례로 볼 때 경북과 경남이 단결하면 민주당에서 아브라함 링컨이 나와도 떨어지고 한나라당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나와도 당선된다. 한국에서 지역감정은 반공이념이니 계급차별이니 그 어떠한 다른 판단 기준보다도 위에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나 다름없다.
"이인제가 호남충청 연합해서 경상도 아들 딸들을 노예로 부리려 한다." 이 말 한 마디 나오면 게임은 끝난다.
셋째, 이인제 희생양론의 유포를 위해 그 동안 참고 있던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들은 이인제가 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경선불복종, 사이비 세대교체론 등 숨겨둔 무기를 꺼내며 마구잡이로 공격할 것이다. 이인제는 이러한 수구세력의 공격을 방어할 능력이 없다.
저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이회창을 상대로 한 이인제와 노무현의 지지도는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평균적으로 단지 2.1% 차이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인제가 단 2.1%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1년이나 남은 대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이 이인제 대세론의 정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민주당 내에서의 동교동 구파의 정치적 야욕도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멀쩡한 노무현보다는 약점이 많은 이인제를 내세우는 것이 훗날 동교동의 생존을 위해서는 더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무현이라면 영남표의 분할, 개혁표의 집결, 인터넷 및 미디어 선거에서의 장점 등을 통해 이회창을 100% 이길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 역시 "노무현만이 우리의 희망이다"라는 당위적 선언을 통해서가 아니라, 5%의 승리의 보증 지지율이라는 정세 분석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는 그렇기 때문에 경선을 불과 2개월 반 앞둔 시점에서 한국 정치의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정치 개혁을 이룩하자!"라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인제 대세론 혹은 대항마론을 이인제 희생양론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제도적 개혁, 혹은 당위적 개혁론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한국에서의 정치란 게임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어떤 정치적 가치 판단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누가 누가 잘싸우나?", "누가 누가 이기나?" 이런 오락적인 목적으로 책을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을 줄 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렇게만 읽어줘도 한국의 정치는 한 걸음 더 전진해 있을 것이다.
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 - 노무현 필승론!
장신기 지음,
거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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