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싸우는 좌파로 살기

김규항의 [B급 좌파]

등록 2002.02.14 19:51수정 2002.05.0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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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계간 <현대사상>이 지식인 리포트 시리즈의 하나로 <한국 좌파의 목소리>라는 자못 도발적인 제목을 단 책을 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긴 하지만, 이렇듯 한국 사회에는 스스로 좌파임을 스스럼없이 내세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김규항 씨의 경우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좌파로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좌파적 삶을 지속하는 제대로 된 좌파가 될 자신은 없단다. 그래서 "초보 좌파"의 의미로 후배가 붙여준 "B급 좌파(야간비행/280쪽)"를 자처한다.


그도 언급하듯 한국에서 좌파로 살기는 매우 고단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굳이 왜 그는 좌파의 길을 추구하는가? 더구나 이념의 시대가 탈색되다 못해 새천년에 들어선 지금 이 마당에 말이다.

그가 좌파가 된 것은 그의 집안 내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찍이 외가 쪽이 좌익이었고, 그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어머니는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 불의를 보고도 참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비굴하면 안 된다"고 일상적으로 훈계하셨단다.

그런 가르침을 따라, 그가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뛰어든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과거 학생운동을 하며 '극렬 좌경'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소위 '유명한 386들'은 정치권에 빌붙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소시민적 삶에 머물렀다. 따라서 김규항의 경우는 스스로 'B급 좌파'라고 겸양을 보이고 있지만 매우 지조 있는 좌파라 할 만하다. 그는 세계적 우경화와 자본주의의 위기가 갈수록 심화되는 시대인 지금이야말로 좌파적 삶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저자가 가장 불만을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소위 혁명을 꿈꾸며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시대 변화를 핑계로 대거 이탈하거나 기껏 대중예술 '평론'이나 '연구'로 소일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평론'이나 '연구'라는 것도 '대중'과는 무관한 것이며, 지식인의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꼬집는다. 이처럼 저자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은 매우 통렬하다.


단적인 예로, 좌파 지식인 그룹이 모여 만든 <진보평론>을 일컬어 "그들의 잡지"라고 말하면서, 이들에 대해 "지적 유희의 정수를 '급진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 "가상현실게임 동호인들(강단좌파들)"이라고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뿐 아니다. 그의 비판의 영역은 의사, 교회, 진보적 영화인들, 수구언론, 사회운동 단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는 이러한 비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자체에 제동을 걸려고 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연민과 분노 등 인간의 정서를 살린 사회주의를 느리게라도 만들어가자고 권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김규항의 글이 2-30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비판을 일삼지만, 단순히 전투적 자유주의자의 '안티'로서가 아니라 80년대 정신적 유산을 간직하고 진지하게 대안을 찾는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글은 지적인 현란함이 아닌 자기 성찰적 고백을 수반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이것이 그가 지닌 장점이다.

그러나 그는 항시 표적을 찾는 사냥꾼처럼 비판거리를 쫓아가기에 가파르고 날카롭다. 때로는 비판 대상에 대한 더 깊은 이해나 대화 없이 칼로 무를 자르듯 재빨리 재단해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있다. 최근 이현주 목사에 대한 비판 글을 그 가운데 하나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한겨레신문에 잠깐 보도된 이 목사의 인터뷰 쪽 글을 보고서 '얼치기 도사'로 그를 폄하했다. 얼마 후 그것으로 모자란 듯 씨네21에 쓴 '존경'이라는 글로 '확인사살'까지 가했다. 물론 9.11 테러와 아프간 전쟁 대한 이현주 목사의 양비론적 인식은 나에게도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부족한 정세인식을 기초로 그를 재단한 것은 아무래도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사람들은 김규항의 정제된 독설을 즐긴다. 촌철살인 그의 글쓰기는 읽은 이로 하여금 분명 통쾌함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의 글이 단지 대리만족 수준의 효과를 낳는 데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그의 글쓰기를 자본의 신과 싸우며 인간의 존엄을 되찾는 하나의 '운동'으로 여기고 있고, 지식인의 현학적 '배설' 이상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런 저자의 바람처럼, 젊은 독자들 가운데 지조가 있으면서도 외골수 아닌 신세대 좌파들이 곳곳에서 생겨났으면 한다. 학생운동 자체가 고사된 듯한 현 대학사회를 보면 이 자본의 전성시대와 싸우는 좌파들이 전에 없이 절실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좌파로 살되, 스스로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상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좌파의 좌파', 즉 성찰적 좌파가 지금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B급 좌파] = 야간비행/2001월 07월/280 쪽

덧붙이는 글 [B급 좌파] = 야간비행/2001월 07월/280 쪽

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야간비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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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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