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에 다녀 왔습니다

등록 2002.02.17 20:40수정 2002.02.1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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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햇살이 유난히 따스한 날이었습니다.


아내의 출산 몸조리를 위해 친구가 빌려준 난방기구를 돌려줄겸 경산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여섯살배기 아들놈이 득달같이 따라나서는 바람에 함께 나섰습니다. 먼저 나서서 신발을 꿰신고 내 신발까지 척 내어놓습니다. 우습게도 녀석이 내마음을 든든하게 합니다.

오랜만에 고속도로를 느긋하게 규정속도로 달렸습니다. 봄기운이 어디선가 꿈틀대는게 느껴집니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향긋한 냄새가 조금 풍기는듯도 했구요. 한 시간여를 달려 친구의 집에 도착하니 친구가 반갑게 맞아줍니다. 제 친구 김형구 군은 강사입니다. 그 부인도 강사인데 느긋하고 물렁하면서도 괴팍한 친구와는 달리 깔끔하면서 상쾌한 사람입니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늘 그랬듯이 온갖 교수자료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고 베란다에는 여러 종류의 화초들이 생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주인의 성품을 짐작케 해주는 풍경입니다. 요긴하게 잘 썼음을 감사하고 잠시 차를 한 잔하는 사이 아들놈의 탐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건을 흐트리거나 망치게 하지는 않아서 그냥 두고 보니 친구도 녀석의 하는 양을 지켜보며 연신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립니다. 조금 늦게 첫아들을 본 친구의 얼굴에 전에 없던 생기와 여유가 보기 좋았습니다. 모두가 친구의 부인인 김영숙 선생 덕분입니다. 작은 체구 어디에 그런 에너지가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한참뒤 친구 내외와 운문사로 드라이브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와 한가하게 드라이브를 하자니 참 좋은 하루입니다.
여느 때처럼 김 선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언제 준비했을지도 모를 간식거리를 부지런히 내어 놓습니다. 대학시절 내가 자취하던 갑제 욕쟁이 할머니집을 지나 청도로 향하는 길은 참 한가하고 예쁩니다.

그런데 좋은 기분을 정작 운문사에 와서 망쳐버렸습니다.
마을 입구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을 여기저기 파헤쳐 놓는가 하면 절입구까지 파헤쳐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림새가 별 점잖치 못한 사내가 주차비라며 이천 원을 내라며 길을 막더군요. 차 가진 죄려니하고 조금 더 가니까 이번엔 한 사람당 천삼백 원이라며 입장료를 내라는 겁니다. 고맙게도 아들놈은 빼주더군요. 돈있는 놈만 산문으로 들라는 건지 영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하지만 경내에 들어서니 그런 불만이 조금 걷힙니다. 보기 드물게 경내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지사처럼 우악스러운 건축물들은 아직 보이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여기 저기를 둘러보며 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상처들과 피로를 치유하고들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 입니다. 입구에서 바친 친구돈 이천 원과 제돈 삼천구백 원이 영 아깝지는 않습니다.

경내를 비켜 흐르는 개울은 너무도 깨끗했으며 정중히 출입을 금하는 몇 군데 금지는 불쾌하기 보다는 절의 품위를 더욱 높여 주는듯합니다. 아들놈은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저 보다 제친구가 제 캠코더를 들고 녀석의 뒤를 쫒느라 정신없습니다. 사실 이 곳은 아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곳입니다. 십수 년전 전통음악 동아리 대벗회에서 이 곳으로 캠핑을 왔는데 내가 일이 있어 먼저 나서자 아내가 부득 부득 버스타는데 까지 바래다 준다고 나섰던 게 제 발등 찍은 꼴이 되었지요.


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 눈에 혼자 소나무 숲사이 오솔길을 걸어가는 아내의 갸날픈(?) 뒷모습이 너무나 깊게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함께 지내던 친구와 그 부인. 그리고 제 아들과 함께 거닐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복잡했던 일상들도 견딜만한 무게로 느껴집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칼국수를 샀습니다.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방학이라 강사료 수입도 없을텐데 염치없게 국물까지 잘 먹었습니다. 주머니엔 설보너스로 받은 용돈이 남아 조금 넉넉했지만 그냥 두고 봅니다. 친구에게 받는 식사대접이 나를 행복하게하고 또한 그것이 내가 친구를 우애하는 방법입니다. 구미일대학에 강의 오는 날중 좋은 날을 잡아서 집 근처 맛있기로 소문난 보리밥집에서 친구 내외를 대접하리라 계획해봅니다.

김영숙 선생은 나에게 차에 걸어두라며 작은 염주를 선물했고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김 선생에게 정목 스님의 산빛 물든 노래 테잎을 하나 선물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조심해 오라는 아내의 잔소리아닌 잔소리가 있었고 휴게소에서 아내가 좋아하는 핫바 두 개를 포장했습니다.
사람 사는 일이 오늘따라 참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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